조선왕릉

단군은 하늘을 열고 태조는 조선을 여니 - 태조 이성계 건원릉

여객전무 2008. 7. 24. 21:01

 역사따라 철길따라(퇴계원역편)

          단군은 하늘을 열고 태조는 조선을 여니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

                                                                                                                   글 임은경

 왕이 살던 궁궐에 가면 호화로운 궁궐장식들이 자태를 뽐내지만 썰렁하기 그지없다. 나라를 열었던 그 때엔 찬란하기 이를 데 없는 왕조였으련만 땅속 한줌 흙이 되어있을 그들에겐 차라리 무덤이 더 많은 사연을 전하고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하던가, 하물며 왕이 묻힌 왕릉에 있어서랴.

조선의 왕릉은 조경학, 건축학, 역사, 정치, 경제, 행정 등 조상들의 고급문화를 망라해 진열해놓은 박물관이다. 조선왕릉을 세계인의 관점에서 보호․관리하기 위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의 준비작업이 한창이다.

 개천절을 앞두고 500년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을 찾아 경춘선 퇴계원역에 내려 역 앞에서 202번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국도를 10분 정도 달리니 동구릉에 이르렀다. 가을날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이 가장 높은 곳에서 능상에 억새풀을 인 채 내려다보며 무게중심을 잡고 있었다. 건원릉 능상에서 600년을 내려온 함흥억새를 보려면 가을에 동구릉을 찾아야 한다.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는 동구릉은 건원릉 조성(1408)이래 조선왕릉 32기 중 9기 17위의 왕릉이 포도송이처럼 조성된 왕릉군(王陵群)이다. 제24대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추존翼宗)의 수릉(綏陵)이 조성되면서 ‘동쪽 아홉 개의 능’인 동구릉(東九陵)이 됐다.

 600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숲길 군데군데 ‘멧돼지 조심’이라고 쓰인 푯말이 눈에 띈다. 작년에 이곳을 찾았을 땐 숲속에서 튀어나와 질주하는 고라니 때문에 놀란 기억도 있다.

 

 건원릉은 경복궁 경회루와 창덕궁 인정전을 지었고 북한 개풍에 있는 원비 한씨의 제릉을 만든 궁중건축가 박자청의 작품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능을 호화판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던 박자청의 사부 김사행은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공사를 맡았는데 왕자의 난에 연루돼 죽음을 맞았다.

 

 정도전과 남온은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臣權)이 강화된 유교주의적 개혁왕국을 세우기 위해 문무를 겸비한 왕자 방원을 제치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11세의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방석에 비하면 방원은 고려 때 과거에 급제했고 막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왕자 중의 왕자였다. 세자책봉이 논의에 오르자 나이와 공로로 세자를 세워야 한다며 방원 편을 든 대신의 주장이 있었으나, 정도전과 남온은 그들이 기획한 신권이 주도권을 잡는 국가를 방원을 통해서는 이룰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태조가 총애하는 강비소생의 어린애를 세자로 세웠고 그 때문에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 됐다.

 

 신덕왕후 강씨는 원정을 나온 이성계의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마음을 얻음으로써 왕후의 자리에까지 오른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요즘 같으면 불륜에 해당했을 그들의 로맨스가 당대 고관대작들에게 허여된 제도로 말미암아 합법화되었다. 당시에는 고향에 둔 아내라는 의미의 향처(鄕妻)와 정사를 보는 서울에 둔 아내라는 의미의 경처(京妻)제도가 있었는데, 따지자면 태조의 원비 한씨는 향처에 해당하고 계비 강씨는 경처에 해당한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개국 1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강비는 조선 최초의 공식 왕비였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비소생의 세자와 방번을 죽인 일로 정치에 뜻을 잃고 고향 함흥으로 가버린 태조는 무학대사의 청으로 다시 한양에 돌아왔지만 태종에 대한 증오가 컸다. 애초에 사랑하는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에 함께 묻히기를 원했던 태조가 죽을 무렵에는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고 했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조라는 사실 때문에 정통성에 위협을 받던 태종은 태조를 이곳에 안장하는 대신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심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태조가 죽자마자 계모 신덕왕후의 정릉을 중구 정동(貞洞)에서 현재 자리로 이장하고 석물을 빼다 청계천 광통교 보수에 썼다. 태조가 어디를 가든 동행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던 신덕왕후 강씨는 다행히(?)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병으로 죽어 아들 방석과 방번이 방원의 손에 죽는 골육상쟁의 비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권력을 잡은 태종에 의해 후궁으로 강등되고 무덤마저 파괴됐다.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을 개국한 강인한 태상왕도 사랑하는 여인을 궁궐에서 보이는 정동에 묻어놓고 명복을 빌기 위해 근처에 세운 정릉사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 만큼 지극히 인간적인 면을 지녔었다. 이 가을, 왕관처럼 봉분위에 억새를 얹고 불어오는 바람에 강비를 향해 흔들리는 인간 이성계의 건원릉에 가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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