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조선왕릉탐방 - 파주 장릉

여객전무 2009. 11. 3. 11:40

[조선왕릉의 비밀 18 - 파주 장릉]
2009-10-26 오후 05:20



              사적 제 203 호 (비공개) | 경기도 파주시 갈현리 산 25-1


 
 
 
                                            < 장릉 | 長陵 >


<인조와 인렬왕후의 합장릉이다. 영조 때인 1731년 현재의 장릉 자리로 이장하면서 왕과 왕비를 합장하였다>

선조의 손자이며 광해군의 조카인 인조(1595~1649)는 서인 세력을 등에 업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서인 세력이 친명주의자였던 만큼 인조는 청나라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청나라와 굴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고, 맏아들과 둘째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을 볼모로 잡히기에 이른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하고 청나라에 대한 적대 감정을 풀지 못하여, 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소현세자와 극도의 불화를 일으킨다. 소현세자, 봉림대군은 인렬왕후(1594~1635) 소생이다. 인렬왕후는 인조가 사가에 있던 시절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릉의 정자각 배위청의 전돌과 초석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국제 정세를 잘못 읽은 탓에, 지금의 송파인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겪고, 두 아들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다>

인조는 인렬왕후가 죽자 지금의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장사 지냈으며, 자신은 그 오른쪽에 묻혔는데, 뱀과 전갈이 석물 틈으로 집을 짓자 영조 때인 1731년 현재의 장릉 자리인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기면서 합장하였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쭉 뻗은 참도의 박석들>


<24년의 재위 기간 내내 고통과 굴욕의 세월을 보내다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인조를 만나러 금천교를 건넌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 옛 능에서 옮겨올 때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등의 크기가 새 능에 맞지 않아 새로 만들었다. 따라서 장릉에서는 처음 조성한 17세기의 석물과 새로 조성한 18세기의 석물이 함께 어우러진다. 병풍석은 구름 무늬와 십이지신상 대신에 모란과 연꽃 무늬를 새기고 있다. 석호는 통통한 몸체에 짧막한 다리, 삐죽이 튀어나온 송곳니가 독특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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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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