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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기자의 바깥 [27] 미얀마 난민

여객전무 2009. 12. 23. 15:43
[최윤필 기자의 바깥] <27> 미얀마 난민 조모아씨
"식민지·군부독재 헤쳐온 한국… 우리도 언젠가 그런 날 오겠죠"
수치 여사 이끄는 버마 최대 야당 한국지부 부총무
'88항쟁' 가담… 94년 입국후 10년간 공장 전전해
대통령·국회의원 투표로 뽑는 한국 민주주의 부러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한국은 내 나라 버마(미얀마)와 비슷한 경험을 지닌 나라입니다. 식민지와 군부독재 시절을 겪었고 망명 정부를 세우기도 했죠. 지금 우리가 겪는 정치적 억압과 난민, 이주노동자 생활을 한국민도 체험했습니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조모아(Zaw moe aungㆍ36)씨의 국적은 미얀마다. 그의 전직은 노동자이고, 현직은 정당 정치인이다. 그가 건넨 명함에는 '민족민주동맹(자유지역) 한국지부ㆍNational League for Democracy(Liberated Area) Korea branch 부총무'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NLD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미얀마 최대 야당이다.

하지만 그의 국제법상의 지위는 난민(難民)이다. 난민협약(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이다.

근대국가의 구성원은 태어나는 즉시 국민으로 편입되며 국적국이 정한 법률의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조모아씨는 바로 그 근대국가 기본 기획의 바깥, 토대의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한국은 조모아씨처럼 법무부가 인정한 난민에 한해 취업과 사회복지 등 기본권(참정권 등 제외)을 내국인에 준해 보장한다. 이를 '협약 난민'이라 하는데 현재 국내에는 155명이 있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낡은 외투 차림의 그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더운 나라에 살다가 여기 온 첫 해 겨울엔 사우나 있다가 갓 나온 것처럼 상쾌하더니, 이제는 한국인들과 똑 같이 추워요."

_ NLD 한국지부를 소개한다면.

"한국에 있는 버마 동포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99년 5월에 NLD 자유지역 본부_미얀마와 태국 국경에 있는 NLD의 해외본부_로부터 지부로 인정받았어요. 현재 동지는 저를 포함해 31명입니다."

_ 하시는 일은.

"강연이나 집회 등을 통해 버마의 실상을 알리고, 주요한 날마다 기념행사를 합니다.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 해제와 2,200명에 이르는 정치인 수감자 석방 서명운동도 하죠. 매주 화요일엔 용산의 주한 버마대사관에서 1인 시위를 이어오고 있고요. 저는 6개월 임기의 상근부총무라 주로 경기 부천의 사무실에 있고, 필요할 땐 통ㆍ번역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_ 사무실 운영비는.

"동지들이 매달 15만원씩 냅니다. 일거리가 없거나 몸이 아파 일을 못 하는 이들이 많아 매달 돈을 내는 동지는 15명 안팎입니다. 형편이 안 돼 적게 내는 동지도 있고요."

그는 공식 국호인 미얀마 대신 버마라는 옛 국호로만 말했다. 1988년 쿠데타로 집권한 버마군부는 그 해 8월 8일 시작된 시민항쟁(88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국호를 미얀마로 선포했다. NLD와 미얀마 민주화 지지세력은 군정의 결정을 보이콧하며 버마라는 국호를 고집하고 있다.

그가 한국에 입국한 것은 스물한 살 때인 1994년이다. 중학교 다니던 열다섯 살에 88항쟁이 일어났고, 자신도 시위에 가담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해부터 미얀마 군정은 대학을 사실상 폐쇄했고, 1993년 고교를 졸업한 그는 대입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한다. "삼촌의 인쇄공장에서 일하다가 산업연수생 시험을 봐서 한국에 왔어요." 한국 행을 택한 것은 국내에 있으면 언젠가는 투옥될 것 같았고, 김대중 선생의 나라이니 버마 민주화에도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배들이 죽고, 끌려가서 갇히는 경우를 많이 듣고 경험했어요. 어머니도 제 걱정을 많이 하시고…."

입국 후 그는 월 18만원씩 받으면서 조명공장, 양말공장 등에서 일했고 2년 뒤부터는 불법체류 노동자 생활을 이어간다. "2004년까지 10년 동안 가구 일 빼고는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어요. 대전 김포 청량리 안양 부천 등지를 떠돌았죠."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이 흔히 겪는 부당한 모욕을 그도 겪는다. "산업연수 기간이 끝난 뒤로는 월급이 80만~120만원 정도 됐어요. 하지만 떼인 적도 많았죠. 욕설 듣는 건 예사고, 얻어맞기도 했어요." 그는 수줍은 듯 웃으며"어디나 나쁜 사람은 있지 않냐"고 나직하게 덧붙였다.

그의 한국어는 매끄러웠다. 기를 쓰고 우리 말과 글을 익혔다고 했다. 억양과 어휘는 그가 이 땅에서 부대껴 온 거친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단정하고 유순했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습니다' '합니다'로 일관하는 그 깍듯함이 짓눌린 상처의 흔적처럼 느껴져 애잔했다, 그의 눈빛처럼.

"한국말 잘 하게 된 뒤로는 억울한 일은 별로 당하지 않아요. 낯설게 빤히 쳐다보는 표정들이 불편하긴 하지만요. 2004년 이후로는 이주노동자 상담소 같은 데 다니면서 통역을 해주고 있어요. 물론 공짜로요." 그는 현재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 경기 고양시 YMCA청소년수련관 다문화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이런저런 강연회와 토론회에 초청받아 일한다. 청소년들에게 미얀마의 전통을 소개하기도 하고, 인권ㆍ시민단체와 함께 미얀마 사진전도 연다. 여행 관련 방송 프로나 다큐멘터리, 관광 팸플릿 제작 작업을 거들며 돈을 벌기도 한다. 그렇게 버는 돈이 월 20만~30만원쯤 된다고 했다.

현재 국내에 체류중인 미얀마 인은 4,000명 남짓이다. 그들도 가끔 NLD 행사에 동참하냐고 묻자 낯빛이 어두워진다. "이따금 찾아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통역으로 도와준 분들도 있고요. 하지만 대부분 한국에 돈 벌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버마에서 출국할 때 특정 단체에 가입하거나 가담하면 안 된다고 서명을 하고 나와요. 또 우리 쪽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 대사관에서 비자 받기 힘들어진다고 얘기하는 한국인 고용주들도 계신대요." 그러다 보니 그는 동포들과 어울리고 싶고 도와주고 싶어도 먼저 선뜻 손을 내밀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향과 가족이 그리울 때, 힘들거나 서러운 일을 당할 때 외롭기도 할 것이다. "처음엔 언어와 음식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리움이 힘들어요. 그래도 그런 생각 하면 안 된다고 다짐해요. 거기서 고생하는 분들이 지금도 많고, 또 여기서 제가 할 일이 많으니까요."

지난 6일 그는 결혼했다. 칠순이 넘은 어머니가 며느릿감으로 소개한 이이문(Yi Yi Monㆍ27)씨와 전화로 선을 봤는데 서로 마음이 맞더라고, 이이문씨가 최근 입국해 식을 올리게 됐다고 했다. 주례는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 이사장으로 알게 된 이래 그를 아들처럼 보살펴주는 부천 석왕사 주지 영담 스님(현 조계종 총무부장)이 섰다. "주지 스님은 명절 땐 과일도 주시고 김장하면 김치도 챙겨주시고…, 2년 전부턴 절 경내에 저와 동료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도 마련해주셨어요." 영담 스님은 각시와 알콩달콩 살라며 절 인근에 살림집 한 칸을 새로 마련해줬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 있으면 들려달라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하는 말.

"일하면서 알게 된 NGO분 중에 누가 얼마 전에 이런 농담을 하셨어요. '한국 민주주의도 다시 힘들어졌으니 민주화운동 함께 하자고요, 우리더러 한국 민주화 되게 도와달래요. 한국과 버마의 상황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물론 농담을 하신 거죠. 다만 전 투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전 태어나서 지금껏 투표를 해본 적이 없어요. 현 군정이 내년에 총선거를 다시 한다고 했지만 그 투표도 진정한 민주주의 투표는 아닐 겁니다. 투표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고 국회의원으로 뽑을 수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부러워요. 그 귀중한 가치를 한국민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광화문의 밤은 울긋불긋 현란했고 그의 얼굴도 살짝 상기된 듯했다. 귀가를 서두르는 품이, 이미 꽃다운 새색시가 기다리는 보금자리에 가 있는 그의 마음을 쫓고 있는 듯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는 협약 난민 외에 우리나라가 난민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난민에 준하는 처지로 판단해 비자 의무를 유예한 '인도적 체류 허가자', 요컨대 난민 지위도 인정받지 못한 주변인도 91명이 있다고 한다. '호모 사케르'의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근저 <목적 없는 수단>에서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래 주창돼 온 천부인권이란 '벌거벗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국민'에게 부여된 권리라는 점을 들어 그 인권의 바깥에 놓인 난민의 문제를 천착한다. "난민이라는 주변적인 현상은 국가-국민-영토라는 낡은 삼위일체를 파괴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우리 정치사의 중심적 형상으로 간주될 만한 가치가 있다." 아감벤은 그 형상과 가능성에서 라이덴병이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바깥이 구별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을, "세계도시라는 그네들의 고대적 소명을 되찾을" 가능성을 엿본다.

눈 앞의 실리를 좇느라 분주한 나머지 지금 우리는 그 매혹적인 미래의 가능성을 못 보고 있지나 않은지…, 그런 반성도 조금은 해야 할 것 같은 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