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명성황후 홍유릉기사(레일로이어지는행복+)

여객전무 2009. 3. 17. 09:58

역사따라 철길따라

일제에 항거한 대한제국 황실 묘역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홍유릉(洪裕陵) 

                                                                                                                                   글 임은경

 광복절을 전후해 찾은 홍유릉(洪裕陵)에는 매미가 짙은 녹음 속에서 이 여름 막바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경춘선 금곡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위치한 홍유릉은 ‘금곡릉’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삼합장릉인 유릉(裕陵)으로 조성되어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사라져간 왕조의 마지막 흔적은 이곳 금곡동에 남아 예순세번째 광복절을 맞고 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잠든 홍릉(洪陵)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후 익종(추존)비 신정왕후 조씨의 지명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고종은 1866년 운현궁에서 명성황후 민씨와 가례를 올렸다. 1895년 일제가 왕궁을 습격하여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시신마저 불에 태워져 유해조차 없던 민비의 장례는 승하한지 2년2개월 만에 치러졌다.

 

 애초에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민비를 폐서인시켰다가 하루 만에 빈(嬪)의 호칭을 내렸고, 그해 다시 왕후로 복위시키는 조서를 내려 동구릉 경역에 위치한 숭릉(崇陵) 오른쪽에 자리를 잡아 국장절차를 진행했다. 황후가 입던 옷을 유해 삼아 겹이불과 겹옷을 입히는 소렴과 대렴을 마친 뒤 빈 관만으로 숙릉(肅陵)이란 능호를 내려 진행되던 장례도 김홍집 내각이 실각함에 따라 5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1897년에야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청량리 홍릉으로 천장함으로써 겨우 장례를 마쳤다.

 

 이 장례절차를 기술한 ‘명성황후국장도감’은 아직도 일본 궁내성 서고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천장론이 일었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지금의 금곡동에 능을 조성하면서 명성황후의 홍릉을 옮겨와 합장했다. 이를 보면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호이지 고종의 능호가 아닌 셈이 된다. 한일합방 후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인 왕(王)과 공(公)으로 편성해 일본 궁내성에 소속시킨 일제가 고종의 능호를 허락할 리 없었다.

 

 고종이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망국의 황제가 능호를 갖는 방법은 명성황후와 합장하여 기존의 능호를 함께 쓰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고종황제는 명성황후와 합장함으로써 겨우 능호를 쓸 수 있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황제와 황후가 능을 쓰는데 겪은 사연은 당시 우리 역사의 질곡만큼이나 곡절이 많았다.

 

홍유릉은 중국 황제의 능제를 따라 정자각 대신 앞면 5칸, 옆면 4칸의 침전이 세워졌다. 침전의 기단 아래 홍살문까지 참도가 깔려있는데, 좌우보다 한단 높게 마련된 중앙 길은 황제와 황후의 영혼이 다니는 길이고 좌우의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이전의 조선 왕릉은 높은 길 하나와 낮은 길 하나의 두 갈래로 구성되어있다. 홍릉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효릉 능설제도를 따랐다고는 하나, 참도 좌우로 늘어 선 키가 큰 석물들이 왜색이 짙어 기품이 없고 가벼워보인다.

 

◈조선의 마지막 27대 순종황제의 삼합장릉 유릉(裕陵)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 민씨는 1897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나 순종 즉위 전에 승하하여 지금의 능동 어린이대공원 터에 모셔졌고, 순종이 즉위하여 민씨를 순명효황후로 추상하면서 민씨의 유강원(裕康園)을 유릉(裕陵)으로 추봉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이왕(李王)’으로 격하된 순종은 덕수궁에 갇혀 망국의 한을 달래다 1926년 승하했다.

 

 순종황제의 인산(因山)일인 6월 10일에는 일제에 항거한 6.10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순종의 능호 역시 일제가 승인할 리 없었고 황실은 고종과 마찬가지로 편법을 동원하여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의 능호를 갖게 한다. 일제로서도 이미 능호를 받은 유릉을 격하시킬 수 없었고 능을 천장하여 부부를 합장하는데 간섭할 수도 없었으므로 부부를 합장하면서 ‘유릉’을 능호로 갖추는 방법을 쓴 것이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계비가 되었다가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어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고 1966년 춘추 72세로 승하, 유릉에 합장되었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일제가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유릉은 조선왕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황제와 황후 둘이 한 능에 잠들어있다. 일제의 침략에 의해 스러져간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남긴 비장함 때문일까. 유릉의 석물들은 홍릉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지만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홍릉에 비해 중후한 느낌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