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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3] 떠돌이 영화감독 신지승

여객전무 2009. 9. 28. 13:17

최윤필 기자의 바깥] <13> 떠돌이 영화감독 신지승

'필이 꽂히는' 동네 만나면 주민을 꼬드겨서 그냥 '마을 영화' 한 편 찍지요
시골 누빈지 10년… 돈도 스타도 출연료도 없어
텃밭 너머 관람석이… 배추·닭과 함께 즐기는 극장
평생 영화 못 본 사람 허다… "마을영화제 만들고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그가 만나자고 한 곳은 경기 양평군 용문면의 한 작은 구멍가게였다. 내비게이션 없는 승용차로 빗길에 주소 하나 달랑 들고 나선 터여서 길을 묻느라 대여섯 번은 차를 세웠고, 그 횟수만큼 전화를 걸어야 했다.

결국 약속 시간을 제법 넘겨서야 닿았고, 훨씬 먼저 나와 서 있었을 그는, 험한 곳에 살아 미안하다는 듯 수줍게 웃으며 들고 있던 비옷을 건넸다. "여기서부턴 승용차가 못 들어가는 길입니다. 10분 정도 걸으셔야 해요." 그는 산 쪽으로 난 좁은 길을 가리켰다. 전국 시골 마을을 10년 동안 누벼온 떠돌이 영화감독 신지승(46)씨다.

그에겐 5톤 트럭을 개조해 만든 촬영차량을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기웃거리며 산지사방 떠도는 게 일이다. '필이 꽂히는' 마을을 만나면 주민들과 무릎 맞대고 앉아 영화 한 편 찍자고 꼬드긴다.

"남녀노소 용모 불문 출연할 수 있고, 연기가 불편하면 스탭을 해도 된다. 영화 찍어서 세상에 알려지면 나도 좋지만 마을도 좋지 않겠나. 물론 출연료는 없다. 혹 돈을 벌게 되면 반은 내 몫, 반은 마을 몫이다. 대신 영화 찍는 동안 먹여주고 재워달라." 이 황당무계한 꼬드김에 누가 넘어갈까 싶은데, 그렇게 찍은 영화가 번듯한 중·장편만 60여 편이라고 한다.

이른바 '마을 영화'다. "늘 성사되는 건 물론 아니죠. '쓸 데 없는 소리 한다'며 두말없이 등 돌리는 마을도 있었고, '도대체 뭘 팔러 온 거냐?'고 묻는 분들도 있죠."

요컨대 그는 돈과 스타 대신 시간과 열정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집에 머물 땐 편집도 하고, 주민들과 마당에서 영화 감상도 하고, 텃밭 일구며 농사도 짓는다. 그의 집 마당에는 "삼계탕 집에서 구출해 왔다"는 육계 몇 마리가 토실하게 살이 올라 뛰어놀고 있었고, 귀퉁이에는 샐비어 몇 송이도 새치름하게 피어 있었다.

"시나리오요? 주민들의 스타일과 마을의 사연에 맞춰요. 성근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으면서 함께 촘촘히 채우고 고쳐가는 식이죠. 가령 이장 댁에 장에 내다 팔 송아지가 있다면 그 송아지를 차에 싣는 장면부터 영화가 시작될 수도 있어요."

강원 홍천군 동면 월운리 이야기다. "그런데 놀란 송아지가 느닷없이 차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이장님이 트럭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겁니다. 30분 가량 기절을 하셨어요. 주민들과 상의해 그것도 연기의 일부로 쓰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변경했죠."

쭈뼛거리며 에돌던 이들도 자기보다 못나고 못하는 옆집 '할매 할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끼워달라'며 나서기 일쑤. 낯선 촬영장비 다루는 걸 어깨 너머로 보다가 헤드폰 끼고 동시녹음 마이크를 들기도 하고, HDV 디지털 동영상 카메라를 메기도 한다.

감독 자리도 주민 몫. 대사나 연기가 상의한 데서 벗어나면 여지없이 끼어든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 축제 같은 마당에서 신감독의 역할은 총감독이다. "어지간하면 주민들에게 맡겨요. 그러다 영 영화가 산으로 간다 싶으면 개입하죠."

그러니까 그의 영화는 엄연한 극영화다. 배우도, 시나리오도, 연기도 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의 배우들은 영화와 함께 점차 배우가 된다는 점이고, 시나리오도 끊임없이 움직이다가 영화의 완성과 함께 매듭지어진다는 점이다.

영화의 전부를 주민들과 함께 만든다는 점에서 감독 한 사람의 예술적 감각에 전적으로 기대는 독립·예술영화와 다르고, 자동차 기름값 빼면 돈 한 푼 안 들인다는 점에서 저예산 영화와도 다르다. 그는 극장도 영화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철저히 영화산업 메커니즘의 바깥을 떠도는 영화인이다.

그렇게 영화 한 편을 찍는 데 짧게는 열흘, 길면 한 달씩 걸린다. 그 동안 그와 스탭들-영화판에서 만난 PD 출신 아내 이은경(40)씨와 가끔 찾아오는 영화 전공 학생들로, 당연히 무보수다-은 주로 마을회관에서 먹고 잔다. 3년 전 전남 담양의 한 마을에서 스탭으로 참여했던 당시 고1 학생 신해인(20·상명대 영화과1)씨가 그의 작업을 도우며 영화를 배우고 있었다.

10여분을 걷자 숲 속 빈 언덕 위에 그의 주거지 겸 작업실인 컨테이너 박스가 나타난다. 마당 끄트머리엔 꽤 너른 단상이 설치돼 있고, 그 양쪽 끝에 당간지주처럼 굵고 긴 쇠파이프가 꽂혀 있다. 스크린 프레임인 셈이다. 스크린과 컨테이너 박스 사이 평평한 땅은 배추 모종이 심겨진 텃밭이고, 텃밭 너머 비스듬히 누운 관람석에는 돌이 층층이 박혀 있다.

- 여기가 극장인가 보죠?

"매달 마을 분들 모셔서 영화를 상영하죠. 외지에 나가 사는 자녀들도 초대받아 자주 와요. 돌 사이에 핀 꽃과 배추들, 닭들과 함께 즐기는 영화관이죠."

- (골짜기 위로 보이는 비석 없는 무덤들을 가리키며) 저기는 VIP석이네요.

"너머부터가 마을 공동묘지예요"

- 무섭지 않으세요?

"맷돼지는 무섭죠. 밤엔 집 밖으로 잘 안 나와요."

고려대 사학과 82학번인 그는, 그 즈음 대학을 다닌 이들이 더러 그랬듯 강의실보다는 바깥에 머물 때가 많았고 극예술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 연극판도 기웃거렸다고 한다.

졸업 후 방송사 드라마 외주를 맡는 독립프로덕션 연출부에서 미니시리즈 제작에 참여하면서 영상세계를 만난다. "1992년에 종로에다 2평짜리 공간을 빌려 영화연구소 'OFIA'(Our Future In The Angle)를 만들었어요. 낮에는 영화 찍고, 밤에는 예술영화 보며 토론하는 모임이었죠."

예술영화 전용관은커녕 '시네마떼끄'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시절이었다. 이명세, 정지영 등 당시 영화감독 지망생들과 친해진 것도 그 즈음부터라고 한다.

"유학생 등을 통해 하나 둘 구한 필름 자료가 3,000여 편쯤 됐어요. 꽤 유명해서 영상자료원에서도 제 테이프를 얻어갈 정도였죠. 그런데 한 7년 정도 그 생활을 하다 보니까 돈도 떨어지고 건강도 나빠지데요." 절터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찾은, 지금의 주소지로 그는 1999년 거처를 옮긴다.

양평으로 들어온 뒤에도 얼마간은 35㎜ 작업을 진행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몽유도원도'라는 작품이다. "아역배우도 있었는데 그 즈음 안면을 튼 동네 꼬마들이 놀러 와 열심히 구경하더니 자기도 끼워달래요." 그래서 시켜봤더니 직업 배우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더라고, 그러면서 차츰 영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라고 그는 말했다.

마을영화라는 장르는 그렇게 탄생했다. "영화를 보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영화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싶었죠." 청소년영화제에 출품하는 고교생 작품도 5,000만원은 들고, 대학생쯤 되면 1억원 예산은 예사다. 저예산 영화라는 '워낭소리'도 제작비 7억원에 홍보비 7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영화 1,000만 관객 시대'라는 통계의 한계, 영화 대중화의 허구를 꼬집기도 했다. "작가주의 영화는 형이상학의 무덤에 갇혀 대중에게 스며들지 못했죠. 예술영화 전용관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잖아요. 대중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60, 70년대만 해도 시골 군 단위마다 드물지 않게 개봉관, 재개봉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졌습니다.

평생 영화 한 편 못 봤다는 분들이 허다해요." 2007년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1년간 영화 관객수는 1억5,877만명, 1인당 세 편(번) 정도는 영화를 봤다는 계산이지만, 그 통계숫자는 대도시 젊은 세대의 영화 편식에 기댄 허구라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 달빛 아래서 혹은 빈 창고에서 순회 마을영화제를 연다. 그럴 때면 다들 배우이자 스탭인 주민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의 연기며 영상처리 기법을 보며 훈수를 두고, 또 그러면서 배운다.

몇년째 영화를 찍는 마을도 있다. 그가 사는 마을은 당연히 10년째 찍고 있고, 처음엔 그를 외면했던 월운리도 5년째 작업이 진행중인 마을이다. 초등학생이던 아이는 고교생이 됐고, 세상을 뜬 노인도 있다.

그 사이 완성한 영화며, 시나리오, NG장면 파일 등은 방대한 영상아카이브를 이뤘고, 온전히 마을의 역사가 됐다. 마을 주민들은 빈 창고 하나를 영상자료실 겸 마을극장으로 개조하는 중이다.

그의 영화가 스타 배우들의 상업영화만큼 세련되기는 힘들 것이다. 또 전문 예술영화 수준의 완성도를 획득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세련미를 추구하다 보면 연기 잘하는 사람을 선별해야 하고, 그러자면 누구를 배제해야 하죠. 또 완성도를 꾀하자면 제가 훨씬 깊이 개입해야 하고요. 그건 바라지 않습니다." 그 틈 사이에 그의 고민이 있을 것이다. 축제와 예술 사이,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의 사이를 그는 10년째 헤쳐 나오고 있다.

그 여정의 기록을 그는 최근 책으로 묶어 냈다.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 만들기>(아름다운사람들 발행)다. 보석들만 모아 만드는 보석영화도, 잘나고 독특한 것들만 모아 만드는 수석영화도 아닌, 삶의 공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냥 돌멩이로 만드는 영화라는 의미다.

책이 나온 뒤 몇몇 방송에서 그의 이야기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는 영화의 내용이나 가치보다 제작 스타일만 주목하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작품들의 가치와 장르의 의미도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자신의 식대로 버젓한 마을영화제를 만드는 것이다. 전국 군 단위마다 약 200개의 마을이 있는데 절반 정도라도 마을 영화를 찍어서 추수 끝낸 뒤 모여 우열을 가리고 잔치도 벌이는 필름 페스티벌을 여는 것이다. 외지 손님에게는 참가비를 받고, 민박을 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0억원 정도면 충분합니다.

드라마 세트장 지어주는 데 40억~ 50억원씩 쓰는 지자체도 많잖아요." 영화 역사가 100년이 됐고, 한국영화도 조만간 90년이 된다. 그의 영화는 전위적이지만, 어쩌면 영화가 탄생하던 그 원년의 모습이 그러했을지 모른다. '영화'와 '산업'의 메커니즘 가장 바깥에서 그는 한국 영화의 미래를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