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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 산악계 휴머니스트 한왕용

여객전무 2009. 9. 28.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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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 산악계 휴머니스트 한왕용 - 아름다운 넘버3
생사 고비에서 산소마스크를 선뜻 내주고
"쇼맨십 싫어" 흔한 후원 하나 없이 자비 등반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연재를 시작하며

마당의 문패를 '바깥'이라고 달기로 했다.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이라는 의미려니 여겨졌으면 좋겠다.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도, 세(勢)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난 주변인도 이 마당의 손님이 될 수 있다. 대개는 사람이겠지만, 공간이거나 잊힌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이야기도 초대될 것이다. 바깥은 안과 마주해야 서는 단어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경계(境界)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할 것이다. 이따금 "어떻게 이게 바깥이야?!" 하며 시비 삼고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계(警戒)가 삼엄하지 않은 사회,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세상, 아예 안과 바깥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마당을 우리는 바란다.

첫 손님은 한국 산악계의 아름다운 넘버3 한왕용(43) 씨다. 듣던 대로 그는 천생 '시골 이장님'이었다. 군살 없는 몸매에 어딘지 어색한 와이셔츠, 스스러운 듯 웃음짓는 거무끄름한 얼굴에 편하게 앉은 자잘한 주름들…. 8000m급 14좌를 국내 세 번째로 완등한(세계 11번째) 사나이. 하지만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의 앞에 엄홍길 박영석이라는 찬란한 1등과 2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많지 않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은 그의 이름 뒤에 '휴머니스트'라는 수식을 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이 찬사가 "참말로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8000미터급 세번째 완등 했지만
엄홍길 박영석 걸출한 이름에 묻혀


2000년 7월 K2 등반 때 그가 고소 증세로 힘들어 하는 동료에게 자신의 산소통을 넘겨주는 바람에 뇌혈관을 다쳐 4차례나 수술 받은 일은 꽤 알려진 일이다.

"나이가 많은 분이었어요. 나는 젊으니까 또 올 수 있지만 그 분은 마지막 기회였죠." 처음부터 무산소 등정을 하는 것과, 중간에 산소마스크를 벗는 것은 다르다. 그 느닷없는 산소 결핍의 고통을 그는 "환장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히말라야 고봉을 처갓집 드나들 듯 하는 전문 산악인들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우러러보는 산이 K2다. 바람을 막아줄 위성봉 하나 없이 8611m의 높이로 오연한 봉. 타클라마칸, 신장ㆍ위구르의 눈폭풍이 아래위 전후좌우에서 몰아치고, 가스 때문에 코 앞도 잘 안 보이던 날이었다고 한다. "정 힘들면 내려가자고 마음먹고 한 발 한 발 가다 보니 정상이데요."

기다시피 하며 내려와 수술을 받았는데 의사는 '다시 산에 가면 죽는다'고 단언했고, 불구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함께 산 지 1년 된 아내와 태어난 지 100일 된 아들이 있던 때였다. 그는 병실에 누워 치료비 걱정을 해야 했고, 가족들에게 미안해 살아 내려온 것이 죄스럽더라고 말했다.

95년 에베레스트 등반 때는 등정 후 하산 길에 베이스캠프의 무전 연락을 받는다. 정상 부근에서 부상을 당한 고려대산악반 대원이 있다는 전갈. 당시 등반대장은 "니가 알아서 판단해"라 말하고 교신을 끊었다고 한다. "8700m 고지였어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내 산소도 달랑달랑하고…, 급경사에다 고정로프도 없는 난코스였어요.

어떤 대장도 자기 대원을 다른 팀 대원을 구하라며 사지(死地)로 갈 것을 명령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는 5시간을 그 자리에 붙박이처럼 앉아 기다렸고, 힘겹게 내려온 대원과 함께 자일을 묶고 무려 12시간의 사투 끝에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캠프까지(직선거리로 불과 400m 정도였다고 한다) 내려왔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대꾸는 솔직했다. "그냥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죠. 하지만 그러면 두고두고 '버리고 왔어' '저 놈이 죽였어' 그런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된 겁니다." 휴머니스트라는 명예로운 칭호 뒤에는 그와 주변의 산 사람들이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자비 등산대 조직 궁핍하나 자유
50만원 넘는 고가장비 하나없어


직업 산악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그는 단 한 번의 후원이나 협찬을 안 받았거나 못 받았다. '알프스의 아들'이라 불리는 산악인 가스통 레뷔파는 "(산의) 왕국에 들어서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라고 했다지만, 현실에서는 돈도 중요한 무기다.

그 돈을 그는 늘 대원들과 함께 모아 산행에 나선다. 그러니 그의 등반대는 늘 가난하다. 98년 낭가파르밧 등정때는 후배랑 달랑 둘이서 셀파도 고소포터도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밥까지 해먹어야 했다고 한다.

"정상서 내려오면 정말 기진맥진 하거든요. 그래도 어쩝니까. 석유버너 지펴서 압력솥에 밥을 안치는데…." 마침 100여 m떨어진 곳에 베이스캠프를 친 또 다른 한국 등반대도 그 날 정상 정복에 성공했던 터.

"요리사랑 키친보이들이 뭔가를 잡아 굽고 삶고 하더라구요. 거기 가서 몇 점 얻어먹었죠." 그럴 거면 밥은 왜 했냐고 물었더니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그게 또 재민데…"라 말했다.

-등반 비용은 어떻게?

"지리산 뱀사골산장에 라면 음료수 날라 주면 kg당 600원씩 줬어요. 산장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밥 해먹고 지게 지고 내려가서 50kg씩 지고 올라오면 점심때죠. 잠시 쉬고 다시 갔다 오면 저녁때 되고, 밥 먹고 자고 새벽 되면 또 나가고….

90년부터 2년 가까이 그 일을 했어요. 96~97년에는 단가가 올라서 kg당 1000원씩 쳐주대요. 설악산 양폭산장 철사다리는 한 판(10kg)에 1만원씩 쳐줬고…. "

-결혼한 뒤에는 못했을 텐데.

"네팔인 친구가 운영하는 현지 가게에 자잘한 등산 장비를 갖다 주고 커미션을 받아 산 적도 있고, 산악 여행사도 잠깐 했고…." 그는 2002년 6월부터 국내 한 등산업체에 홍보부장이라는 직함을 얻어 얼마간의 월급을 받고 있다.

-협찬ㆍ후원 원한 적 없나.

"협찬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부담이 되죠. 무리를 해서라도 정상 가서 깃발 들고 사진도 찍어야 되고, 그러다 보면 사고가 나기도 하고, 힘들고 정신 없는데 사진 찍어서 보내야 하고, 쇼맨십도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런 것도 없고…, 또 3등을 누가 거들떠 보나요?" 그가 조직한 등반대에서 지금껏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는 건 결코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대장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없다는 평을 듣는 건 아닌가. 대장이나 대원이나 함께 돈 모아서 가는 거니까.

"하하, 그것도 그렇네. 근데 젤 좋은 리더십은 솔선수범 아닌가요? 칼 들고 맨 앞서 뛰어나가는 옛날 전쟁터의 장군들처럼요."

정말 그에겐 '쇼맨십'이 없다. IMF한파가 매섭던 98년 봄, 그는 안나푸르나에 있었다. "혼자였는데 바로 앞에 정상이 보이더군요. 베이스에 있던 대장이 무전으로 라디오 생방송을 물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보니 아니었어요. 할 수 없이 생방송에 대고 '아~ 와보니, 뒤에 더 높은 게 있네요'라고 했죠. 아나운서가 나중에 다시 연결하겠다며 황급히 끊더군요.

정말로 정상 가까이 갔는데, 힘든 시절이니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멘트를 해달라고 주문을 한대요. 몇 마디를 불러주는데 기억은 못하겠고, 힘들고 정신도 없고…, 눈밭에 대충 받아 적었어요. 그런데…." 그가 한 멘트는 "아~ 대장님, 바람에 다 날려가 버렸습니다" 였다. 글이 눈보라에 지워졌던 것이다.

고도 8000m의 세상을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전해 듣거나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누구는 초월적 자연과 미학적 숭고함을 이야기하고, 또 누구는 자아나 인간 존재와의 철학적 대면을 말한다. 한 씨는 "꿈과 희망이 어디가 있어요? 아무 생각 없어요. 무사히 내려갈 일만 생각할 뿐"이라고 말했다.

결과만 중시하는 등반은 싫어
"클린마운틴 캠페인 보람 크죠"


7000m급 미답봉(未踏峰) 등반과, 50년도 더 전부터 길이 난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 중 어떤 게 더 힘들까. 최고의 장비와 시스템의 지원을 받으며 평탄한 노멀루트(Normal Route)로 오르는 것과 고정로프도 셀파도 없이 고난도 신루트를 개척하며 오르는 것을 나란히 놓는 것도 부당해 보인다.

그에게 '14좌 완등'이라는 기록의 의미는 뭘까. "그냥 좋아서, 하고싶어서 한 겁니다. 알아달라고 산 탄 적 없어요.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냥 저와의 약속이었죠."

스스로를 별로 실력 없는 등반가라고, 그래서 노멀 루트도 꽤 탔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과정 없이 결과만 중시하는 등반은 싫다"고 말했다. "제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게 95년인데 세계에서 521번째였어요. 지금은 카운팅을 안 해요. 한 해에 400명, 500명씩 오르죠. 5만 달러만 내면 포터가 업고 정상까지 갑니다.

사람들은 정상에 선 사진만 보여주지 업혀 갔다는 얘기는 안 하죠." 지자체의 등반대 지원이 부쩍 늘었지만 등반대가 목표를 말하면 공무원들의 첫 마디가 "그거 말고 에베레스트!"라고 한단다.

3000m 6000m 봉을 경험하지 않고 8000m로 직행하는 것은 등반의 진짜 행복을 놓치는 일일 뿐 아니라 높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그는 믿는다. "재미와 행복의 99%는 이 바닥에서부터 7999m까지 펼쳐져 있는데, 사람들은 정상의 1%에만 열광해요."

무던하던 아내(42)가 2003년 14좌의 마지막 등반(가셔브룸2, 브로드피크) 직전에 처음으로 '이제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간호사 벌이로 혼자 살림 꾸려가며 길게는 한 해의 절반씩 나가 사는 남편 바라지하고 아이 키워온 아내의 애원에 그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약속한다. 그는 성공했고, 지금껏 약속을 지켰다.

그는 '클린 마운틴'이라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아내와의 약속대로 목숨을 건 '기록' 도전에 매달리지 않고, 산 쓰레기며 버려진 장비 식량따위를 수거하고 다닌다. 클린 마운틴은 산악 환경에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 등반가들의 모임인데 회원 수는 40명 남짓 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청소라기보다는 캠페인인데, 그가 내ㆍ외신을 통해 이만큼이나마 알려진 것도 기록 때문이 아니라 이 활동 덕이다. 최근에는 미국 보스턴까지 가서 국제적인 아웃도어 환경 운동인 'LEAVE NO TRACE'(흔적 남기지 않기) 교육을 받고 오기도 했다.

지난 주말(20일) 그는 클린 마운틴 회원 13명과 함께 뚜르 드 몽블랑(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권역 900~2000미터 고지 167km 구간) 지역으로 출국했다. 15일 일정의 경비는 물론 갹출이다.

85년 대학 산악반에 들면서부터 지금껏 산을 탔지만 50만원이 넘는 고가 장비는 단 하나도 사 본적이 없다는 그에게 요즘은 소속된 업체에서 최고의 장비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지금쯤 그는 최고급 장비를 짊어지고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