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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 노래 '광야에서'를 만든 문대현

여객전무 2009. 9. 28. 13:47
[최윤필 기자의 바깥] <2> 노래 '광야에서'를 만든 문대현
두툼한 웃음으로 격랑의 시대 버텨낸…
친형 문승현과 '노찾사' 탄생에 일조, 광야에서는 취중 30분만에 나온 곡
김민기로 시작되는 노래운동 흐름에서, 도드라진 주역은 아니지만 '굵은 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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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경진기자 jinjin@hk.co.kr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첫 공연이 있던 1987년 10월 서울 종로5가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관. 3부의 끄트머리 합창곡 '광야에서'의 전주가 시작되자 객석은 예약된 감동의 긴장으로 고요해졌다. 곡 중반, 호흡의 율동처럼 잔잔히 오르내리던 음률이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폭발하듯 제 옥타브 너머로 치솟고, 기다렸던 듯 객석도 함께 솟구쳤다.

가수와 관객은 하나로 "우리 어찌 가난하리요~"를 노래했고, 그 날의 극장은 모두가 함께 섰던 '광야'였다. 6.29선언 직후, 다소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그래도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마련된 공연이었고, 제대로 된 극장에서 가진 첫 '운동(권)가요' 공연이었다.

공연의 감동과 격정은 노래 자체에 대한 감동이기도 했겠지만, 견고한 금기의 파열이 주는 희열과 승리 혹은 벅찬 희망의 용출이기도 했다. 그 공연 내내 20대 중반의 청년 문대현(성대 무역 82학번)은 무대 뒤에서 이따금 심벌즈로 연주 양념을 치면서 무대 위 연주자들의 기타를 튜닝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지난 22일 성공회대에서 열린 노무현 전대통령 추모 공연 <다시, 바람이 분다>의 첫 무대에는 노찾사가 섰고, 그들의 마지막 노래 역시 '광야에서'였다.

진행자는 '희망의 바람'을 이야기했고 수만의 관객은 22년 전 그 날처럼 박수와 함성으로 호응했지만, 아마도 거기에는 아득한 슬픔과 다급한 어떤 다짐의 목놓음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 2002년 연세대 노천극장 공연 <바람이 분다>의 연출을 맡았던 문대현 씨는 이 공연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왜? 그는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성글고 두툼한 웃음…. 그는 서글프거나 겸연쩍거나 화나거나 어이없거나, 심지어 뿌듯할 때에도 별로 다르지 않은 표정과 소리로, 성근 듯 두툼하게 웃었다.

그 어떤 정서와도 푸근히 연대할 듯한 저 웃음이 그의 노래와 같은 것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여행을 가도 슬프고 연애를 해도 슬펐던" 22살의 그가 저 노래 '광야에서'를 만들었다.

"87년 공연의 사연은 아주 길죠. 70년대의 민기 형(김민기) 얘기를 해야 할 것이고,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와 80년 광주항쟁 이후 '메아리'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겁니다. 또 그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비(반)합법 전위노래운동집단 '새벽'과 노래운동의 외연을 넓히기 위한 다양한 고민과 시도들도 말해야 겠죠."

그 시도들 가운데 하나가 노찾사 1회 공연 직전 서울 여의도 여성민우회관에서 가진 새벽의 '노래 한마당' 공연이다. 200석 남짓의 강당을 빌려 홍보랄 것도 없이 벌인 무대였지만 "과장 없이 정말 무슨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 직후 그의 형인 문승현(서울대 정치 78학번)을 비롯한 새벽의 주역들이 서울대 메아리와 이대 한소리 고려대 노래얼 연세대 울림터 등서 활약하던 노래꾼 20여 명을 모아 만든 게 노찾사다.

"6.29선언 이후 유화국면이 이어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웠어요. 그래서 새벽은 온전히 지키면서 비교적 알려진 이들을 중심으로 합법적인 대중 노래운동 단체를 만든 거죠."

87년 이후 3년 남짓 동안은 노래운동의 프리미엄 시대였고, 노찾사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그는 공연 직후인 87년 11월 입대한다. '폼 나던' 시절을 내내 군대에서 보내고 제대할 즈음에는 동구권이 한창 엎어지고 있었고, 노래운동을 포함한 대다수 부문운동 진영이 제 조직 추스르기에도 헉헉대던 시기였다.

노찾사의 인기도 예전만 못 했고, '새벽' 역시 문민정부 출범 이듬해인 93년 2월 공연을 끝으로 파장 무드가 완연했다. "우울했죠. 김포공항 나갈 일이 잦았던 시절입니다." 리더였던 문승현이 러시아로 음악 유학을 떠나고 여건이 되던 새벽 멤버들 여럿도 그 즈음 독일로 미국으로 떠났다.

제대 직후 그는 '노찾사'의 음악감독 등을 맡아 뚝심 있게 일했고, 94년의 노찾사 10주년 기념음반 등 작업을 주도했다. 사이사이 대기업 미디어회사에 취직해 '음반 장사'도 했고, 무역회사에 취직해 돈을 번 적도 있다고 한다.

98년부터는 작업실(문스튜디오)을 만들어 녹음 일을 하면서, 드라마와 영화음악 작업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요컨대 그는 단 한 순간도 음악운동의 큰 흐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음악은 언제 시작했나.

"초등 3, 4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중학교땐 형 기타를 들고 독학했죠. 노래를 시작한 건 대학 2학년 때 성대 노래패 '소리사랑(舍廊)'을 만들면서부터예요."

-'광야에서'는 어떻게 만든 건가.

"84년 이화여대 '한소리' 공연을 보고 각자 공연 평을 하는 자리에서 제가 '그래도 노래팀이면 창작곡 한 곡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큰 소리를 쳐버렸어요. 얼마 뒤 성대 공연이 예정돼 있었거든요. 막걸리 잔뜩 마시고 앉아서 한 30분 만에 만든 노래예요."

-초연 반응은 어땠나.

"성대 강당에서 기타 두 대로 반주하면서 합창을 했어요. 그 땐 정말 벅차더군요. 앵콜도 여러 번 받았고…."

-가사가 은근히 민족주의적인데.

"독립군가가 유행했고, 신독립군가가 만들어지던 시절이었죠. 한ㆍ일 문화교류 한답시고 전두환씨가 일본 가서 천황 알현한다고 난리였던 때였고요. 그러다 보니 만주 벌판이 떠올랐나 봐요.

민기형의 '천리길'이나 '아침이슬'의 상징적 이미지 등등이 뒤섞여 내재해있다가 술기운에 그렇게 나온 것 같아요." 훗날 그는 어떤 글에서 "('광야에서'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 속에서 무엇도 할 수 없어 자괴하던 나의 독백"이었다며 "그 광야는 어느 시인의 것이기도 하고, 술 취해 부르던 노래 '아침이슬'의 광야이기도 하다"고 적었다.

-노래방 저작권료는 얼마나 나오나.

"얼마 안 돼요. 다 뭉뚱그려서 일년에 수백 만원 정도?" 군대 시절 만들어 김광석이 부른 '꽃'과, 정호승의 시에 곡을 붙인 '슬픔이 기쁨에게', "친한 사람들 다 잡혀가는 바람에 함께 술 마실 사람이 없어 만든" '동지를 위하여' 등을 뭉뚱그렸다는 의미이고, 드라마 '불새' 등의 몇몇 삽입곡과 영화 '국화꽃 향기'의 음악까지를 뭉뚱그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형 문승현은 80년 이후 노래운동의 도드라진 주역이다. '오월의 노래' '그날이 오면' '사계' '영산강' 등을 만들었고, '메아리'와 '새벽', 초창기 노찾사의 이념적ㆍ실질적 리더였다.

-형 영향이 컸겠다.

"컸죠. 제 기타를 처음 산 게 30대 초반이었으니까요."

그가 지향했던 노래운동의 대척점에 그룹 '동물원'이 있었다. 88년 활동을 시작한 동물원은 흑백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사회와 대학에 대한 냉소를 실어 동물원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회색분자를 자처하며 숨막히는 젊음의 서정을 노래했다. 동물원의 리더 김창기씨는 김광석 등과 함께 지금도, 그 시절에도 문 씨의 "둘도 없는" 82학번 동갑내기 친구다.

-김창기 씨가 몇 년 전 한 인터뷰에서 그 시절을 두고 "천박한 노래와 용맹스러운 노래들만 존재하던 때" 라 말한 적이 있는데.(전화 통화에서 김창기씨는 "한쪽에서는 '아~ 대한민국'이 흘러 넘쳤고 다른 한쪽에서는 피와 죽음이 난무했다"며 "시대적 요구에 성실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도구로서의 음악'에는 지금도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건 창기가 우리와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노래를 충분히 듣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창기와 제가 그 사이에 얼마나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만나서는 '우리 함께 음반 하나 만들어보자'는 얘기도 했어요. 정말 그럴 마음도 있고요."

판단들은 다 다르겠지만, 그 시절 불리던 적지 않은 노래들이 '시대적 요구'에 쫓겨 미학적 요구까지 수용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대중성과 운동성, 음악적 미학까지 넉넉히 품었던 노래들, 그래서 한 시절의 물결에 얹혀 흘러가버린 유행가가 아니라 지금 여전히 푸르게 출렁이는 노래들도 적지 않다.

지난 해 6월 노찾사 공연의 제목은 '노찾사 김민기를 부르다'였다. 노찾사 원년 맴버이자 현 대표인 한동헌(서울대 경제 77학번)씨는 그 공연을 두고 "김민기 선배의 음악을 재조명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요구인 '지성적 대중음악'의 실체와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성적 대중음악이 뭔가.

"뭔 말인지 대충은 알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수준이랄까, 품위랄까, 세상과 삶에 대한 고민의 깊이나 표현이랄까 하는 것들이 더 깊어지고 높아져야 한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고…, 그거야말로 노래로 보여주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어요?"

한동헌씨는 노찾사나 정태춘의 몇몇 노래, 이적의 노래, 외국의 경우 레너드 코헨이나 밥 딜런, 데오도라키스의 노래 등이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씨의 말처럼 우리 노래운동 이야기 첫 문장의 주어는, 본인은 손사래 칠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김민기'여야 할 것이다. 그 뒤로 문승현, 김창남(서울대 경영 78ㆍ성공회대 교수), 한동헌 등등이 굵은 글씨로 이어질 것이고,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윤도현 등 대중 스타의 이름들이 따라붙을 것이다.

'문대현'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조금은 낯설게 눈에 띌 것이라 여겼다. 그는 언제나 노래운동의 굵은 뼈대로 서있었지만 그 자리는 그리 눈에 띄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만났고, 그래서 그는 한사코 인터뷰를 피하려 했다. 그는 '불성실'(?)하고 기억력마저 비협조적(?)인 인터뷰이었고, 그랬기에 우리는 몇 권의 책을 뒤지고 몇몇 이웃들의 전화인터뷰를 따로 해야 했다.

지금이야말로 '노래(지성적 대중음악)'를 찾는 사람들'이 간절해진 시대 같다고 하자, 그는 대답 없이 또 두툼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