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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4] 수영국가대표 배준모

여객전무 2009. 9. 29. 13:02
스포츠
[최윤필 기자의 바깥] <4>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
순한 은갈치가 독기를 뿜어낸다면…
박태환 선수 룸메이트, 경기서 늘 뒤지지만 한번도 다툰 적 없어
감독님·선배들은 독기 부족하다지만 이기고 싶어
이번 세계대회는 기록 단축이 목표, 조금씩 줄이다보면…
수영 국가대표 배준모(20)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를 주목하는 이는 더 없다. 드물게 호명되더라도 대개 박태환(20) 선수와 함께였다. 언론은 그를 '박태환의 기록훈련 파트너'라 부르곤 했다. '바깥'에 그를 초대한 것은 '훈련 파트너'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삐뚜름하게 봐서 그렇겠지만, 그 단어에서는 왠지 기능적 저울질의 불편함이 느껴졌다.

가드로 얼굴만 간신히 가린 채 챔피언의 매서운 주먹질에 제 몸을 내맡기던 어떤 복싱영화의 '스파링 파트너'도 연상됐다. 비애랄까 연민이랄까 하는 감상에 젖게 하는 그 삐딱한 뉘앙스가 싫어서였다.

로마에서 열리는 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앞둔 태릉선수촌 분위기는 긴장으로 팽팽했다. 인터뷰를 주선한 수영 국가대표팀 노민상(53)감독이 '허락'한 인터뷰 시간은 30분. 훈련하는 모습이라도 봐야겠기에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웨이트 트레이닝장에 있었다.

"저 아이예요. 벤치프레스에 누워있는 녀석 있죠?!" 노감독에겐 '태환이'도, 맞형 정두희(25) 선수도 '아이'인 듯했다. "준모는 태환이랑 동갑내기 친구예요. 두 녀석이 8살 때던가, 수영 갓 시작했을 때 제 집에서 며칠씩 묵다 가곤 했죠. 당시 준모 트레이너가 제 후배였거든요."

어떤 선수인지 물었다. "순하고 착한 아이죠. 몸도 되고 재능도 있는데, '독기'가 부족해요. 없진 않겠지만 좀체 드러내질 않아요. 태환이는 지고는 못 견디는 악바린데…." 그는 혼자 벤치프레스에 누워 제 몸무게보다 무거운 무게를 밀어대고 있었고, 멀찍이서 낯선 기구와 씨름하고 있는 박태환 선수 곁에는 전담 트레이너가 붙어 서 있었다.

"준모는 탄력이 좀 아쉬워요. 태환이가 막판 스퍼트할 때 봤죠?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치고 나가는 힘인데…, 그게 부족해요. 얼마 전부턴 그걸 집중적으로 키워주고 있죠. 지금은 '조정기'라 부하를 좀 줄인 상태고요." 대회가 임박해지면 근육운동 강도나 훈련량은 줄이고 휴식 시간은 늘인다.

대신 순간 훈련 강도를 높임으로써 선수들의 경기 컨디션을 극대화하게 되는데 이 기간이 '조정기'다. 선수들에게 나눠줄 연습 프로그램을 슬쩍 훔쳐봤더니 오후 4시부터 입수(入水)해서 헤엄쳐야 할 거리가 무려 7,000m다. 노 감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독하게 할 땐 1만5,000m"라고 말했다.

박태환 선수의 기록훈련 파트너라는 게 있냐고 물었더니 노 감독은 정색을 한다. "태환이가 워낙 잘하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런 식으로 쓰는데, 모두가 대표선수고, 모두가 서로의 훈련파트너죠. 서로 자극받으면서 함께 경쟁력을 키우는 관계라는 얘깁니다.

다들 꿈이 있고, 욕심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애들도 상처 받고 나도 쟤들 훈련시킬 명분이 없어져요. 일찍부터 잘하는 애 있고, 늦게 치고 나가는 애도 있거든요. 지금은 모두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과정에 있는 겁니다."

노 감독은 "그래서 태환이 입촌한 뒤로는 거의 모든 인터뷰를 사절하고 있다고, 듣기 좋아라고 한 말이겠지만 "이번엔 취지가 마음에 들어 응했다"고 말했다.

노 감독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자유형 800m 계영에 대한 욕심을 내비친 바 있다. 알다시피 계영은 4명이 하는 경기고 모두 잘 해야 승산이 있는 종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계영 욕심을 내는 거냐고 물었더니 노 감독은 "태환이 있을 때 기회를 잡고 싶은 욕심도 있고, 다른 선수들도 좀 봐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죠. 200m 기록으로 1분 48초대 2명, 1분 47초대 1명만 있으면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욕심 내볼 만한데, 지금 50초대에 세 명 정도가 있어요. 걔들이 치고 나갈 수 있게 훈련하고 있습니다."(한국신기록은 박태환 선수가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 세운 1분 44초 85다.)

수영장 앞뜰에서 그런 저런 얘기들을 주고받는 사이 시간이 됐고, 선수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걷던 배준모 선수는 우리를 보자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시간에 쫓겨 곧장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그의 대답은 느긋했다.

-하루 일과는.

"7시에 밥 먹고 8시30분에 수영장 가서 30분 스트레칭, 11시30분까지 운동하고, 12시 식사하고, 잠깐 쉬다가 오후 2시40분쯤 웨이트장 가서 몸 풀고, 4시에 수영장 와서 7시 정도까지 운동하고, 저녁 먹고 10시쯤 자요."

그는 7살 때 고향 대구에서 처음 수영을 배운다. 코치의 권유로 범물초등학교에 입학해 수영부에 들었고, 범물중- 대구체고를 거치면서 청소년 수영의 강자로 꽤 날렸다고 한다. 물론 늘 박태환이 있었지만 말이다.

-메달도 많이 땄겠다.

"초등 4학년때 소년체전 유년부에 출전해 3등 했고, 태환이가 2등. 6학년땐 자유형 200m에서 태환이가 1등, 전 3등. 중3때 소년체전 800m는 1등을 했는데, 태환이는 200과 400에 나갔었어요. 그런 식이었어요."

그는 '태환이'를 앞세워 제 성적을 말했고, 말끝마다 쑥스러운 듯 웃었다. 지난 해 전국체전에서 배준모 선수는 5관왕이었고, MVP였던 박태환 선수도 5관왕이었다.

-함께 출전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적은.

"없어요."

-한 번도?

"네." 그러곤 또 웃고….

-밉겠다.

"밉죠. 괴물 같아요. 우리나라 자유형 선수 모두가 그럴 거예요. 어릴 때부터 대회 나갈 때마다 태환이가 어떤 종목에 나가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으니까요. 그래도 태환이 없이 1등 해봐야 국내 1등이잖아요. 태환이가 있으니까 도움이 많이 돼요."

-어떤 도움?

"폼 보면서도 배우고, 경험 들으면서도 배우고…,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해줘요."

그는 박태환 선수와 늘 한 방을 쓴다. 지난 해 올림픽 전에도 6개월을 지냈고, 지금도 룸메이트다.

-다툰 적은 없나.

"없어요."

-한 번도? 기분 상한 적도?

-"네, 한 번도요." 그러면서, 방 청소도 '태환이'가 더 자주 한다고, 쓰레기통 비우려고 보면 벌써 비워져 있기 일쑤라고 덧붙였다.

-이기고 싶을 텐데.

"그런데, 워낙 잘하니까…, 늘 앞에 가니까…, '아~ 또 앞에 가는구나' 그러죠 뭐,. 이기고 싶지만 뜻대로 잘 안 돼요. 하하하."

-'독기'가 부족하다던데.

"저도 그런 것 같은데요."

-독기 없이 어떻게 국가대표가 되나.

"모르겠어요. 어찌 하다 보니까… 하하"

강용환 선수는 '후배 준모'를 "힘들어도 힘들단 말 좀체 안 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도 늘 묵묵히 열심히 하는 착한 후배"라고 말했고, 박태환 선수는 '친구 준모'를 "기록이 좀 안 나와도 늘 밝고, 주위와 분위기를 맞춰주는 어른스러운 친구라 동갑이어도 제가 많이 의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에 그가 단거리 주력 훈련프로그램을 짜준 코치진에게 장거리로 바꿔달라고 '어필'했고, 코치진도 흔쾌히 수락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극히(!) 이례적인 경우"라며 노 감독은 은근히 기뻐했다. 아쉽게 생각하던 배준모의 '독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단거리만 하면 800m는 못 하거든요. 800m도 제 종목이니까 하는 데까지 하고 싶어요."

그래도 그의 주종목은 200m다. 그의 기록은 1분50초99. 박태환 선수보다 6초 남짓, 거리로는 10미터 가량 뒤진다. 그 만만찮은 차이를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누군가 저보다 앞에 있으면 그게 누구건 차이가 얼마건, 그가 두 번 찰 때 전 세 번 차고, 세 번 저을 때 네 번 저으려고 노력해야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하하하" 종목당 국가별 2명만 출전할 수 있는 이번 세계선수권에 그가 출전하는 종목도 자유형 100ㆍ200ㆍ800m. 200m에는 박태환 선수랑 함께 출전한다.

그는 아직 세계대회 메달을 목에 건 적이 없다. 이번 선수권대회 결선 진출도 어렵다고 한다.(1분46초대는 돼야 한단다.) 요는 자신의 기록 경신인데, 노 감독은 47,48초대를 욕심 내고 있고 그는 "우선은 49초가 목표"라고 말했다. "조금씩 줄이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죠." 그러곤 또 웃는다.

식상하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말, 승부는 냉정하다. 더욱이 수영은 0.01초를 따져 승패를 가르는, 물처럼 차가운 기록경기다. 수영이 좋냐고 묻자 물처럼 담백하게 대답한다.

"태어나서 해본 게 수영밖에 없고, 그래서 싫어도 해야 하는 게 수영"이라고. 그 대답이 자신이 듣기에도 너무 '담백'했던지 "기록 잘 나오면 좋고, 힘들 때는 정말 싫고, 좋을 때보다 싫을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수영이 좋다"고 덧붙였다.

뭔 말이냐고 물었더니 또 웃는다.그가 지닌 독기랄까 근성이랄까 하는 것들이 배어 나온다면 그 스밈의 무늬 역시 저런 숫된 미소와 어수룩한 고백의 형식이 아닐까 싶었다.

수영엔 이변이 드물다지만 그래도, 그가 이번 대회 자유형 200m예선을 통과해 결승 출발대에 박태환 선수와 함께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태환 선수를 앞지르긴 힘들겠지만, 그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자신의 이번 목표를 멋지게 달성하더라도 메달을 따긴 힘들 것이고 한국신기록에도 훨씬 못 미치겠지만, 그의 기록에 세상이 함께 기뻐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가 말끝마다 덧붙이곤 하던 그의 '언젠가'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