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기사

최윤필 기자의 바깥 [6] IMF 명퇴 1세대 정석희씨

여객전무 2009. 9. 29. 13:07

 

 

[최윤필 기자의 바깥] <6> IMF 명퇴 1세대 정석희씨
'은행원의 꽃'에서 떨궈진 10년… '비밀의 화원'서 위안 찾다
1998년 지점장서 쫓겨났을땐 절망과 암담뿐
상처 달래려 사찰방문 '하루출가' 모임 만들어
전세버스 안 '출행 인사' 묶어서 책으로 발간도
富·명예 욕심 있지만 이대로가 내 운명의 그릇
"은행원은 몇 살까지 할 수 있어요?"

"보통 40대 중ㆍ후반까지는 할 수 있어요. 끈질기게 남아 있는다면 더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만 두죠.~"

어떤 이가 인터넷 사이트에 저런 질문을 올렸고 또 어떤 이가 저런 답변을 달았다. 저 대답이 그대로 사실인지는 따로 따져봐야 알 일이지만, 저간 경향으로 판단컨대 크게 틀리진 않을 듯하다.

정석희(66) 씨는 IMF 구제금융사태 직후인 1998년 금융권 구조조정 첫 쓰나미에 희생된 '명예퇴직' 1세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해 55세(정년 58세)까지 일했고 '행원의 꽃'이라는 지점장으로 5년쯤 지냈다.

그러니 현재 기준으로 본다면 비교적 넉넉하게 누린 셈인데, 그는 그 떨궈진 상처에 대해 당시 심정으론 "한 마디로 절망, 암담 그 자체였다"고 회고한다. "사람 만나는 건 고사하고 위로한답시고 걸어오는 지인들의 전화조차 받기 싫었으니까요."

도(道)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는 '비움'의 관점에서 보자면 네이버 답변의 저 덤덤한 어조- 냉소의 기미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는, 정 씨의 그것과 견준다면 가히 한 경지(境地)라 할 만하다.

우리 사회의 상식이 감당해낸 IMF사태 이후 10년의 낙차가 저리 무섭다. 한국 자본주의의 글로벌화를 위해 반드시 획득해야 할 필수요소로 언급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아직 기업가의 독점적 단어이지, 노동자의 언어는 아니다.

해고뿐 아니라 재고용ㆍ재취업의 탄력과 운동성이 어지간은 해야 시장 유연성도 말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비움이라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비워짐이다. 비워짐은 상처이고, 10년의 낙차란 상처의 일반화, 일상화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어진 정 씨의 회고. "자식 넷 중에 세 명이 학교를 다니던 터라 한창 돈이 들어갈 때였어요. 돈도 돈이지만, 상실감과 자존심의 상처가 제일 컸죠. 징후는 있었지만 다들'설마…'하는 심정이었거든요."

그가 다녔던 은행은 전 직원 약 9,000 명 가운데 1,000명이 넘는 인원을 1차 해고했다. 퇴출 사태는 2차, 3차로 이어졌고, 은행 합병과 간판 바꿔 달기가 진행되면서 '희망퇴직'명단에는 30대 행원들까지 포함되곤 했다.

"살면서 자주 느끼는 거지만 남 좋은 일에는 전화들을 잘 안 하는데 남이 잘 안 됐을 때 위로전화는 많이 해요. '어찌 된 거냐' '어떻게 살 거냐'…. 복덕방을 하던 한 친구는 '내 사무실에 와서 바둑이나 두면서 소일하라'고도 하더군요. 그 말 듣고 어찌나 노여워지던지…, 모욕을 당한 것 같았어요."

퇴직자 모임은 그 직후에 만들어졌고, 불교에 관심이 있는 이들끼리 99년 1월부터'하루 출가'라는 이름을 달아 전국의 사찰을 다니기 시작했다. 종교로부터 뭔가 대단한 것을 얻자는 뜻보다는 힘드니까 기대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사회가 준 상처를 자연이 치유해주는 예는 흔하고, 의사의 백 마디 격려보다 같은 병실 환자의 한 마디 경험담이 더 큰 위안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세월이 가면서 멤버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들은 매달 빠짐없이 전국의 절을 다니며 자연의 풍광도 즐기고 스님들의 설법도 청해 들었다. 그 여정이 만 10년을 넘겼고, 지난 해 5월로 100회를 넘겼다.

정 씨는 모임 출범 때부터 지금껏 내리 집권해 온 회장이자, 스타(?) 강연자. 출행 인사로 시작했을 전세버스 안 '한 말씀'이 법문(法問)이 되고, 해를 거듭하면서 시간도 늘고 내용도 튼실해졌는데, 그 '말씀'들을 묶어 최근 책(<10년간의 하루출가>, 황소자리)을 냈다.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된 IMF 실직자들의 특별한 자기수행'이라는 부제에서 짐작되듯, 정씨의 버스 강연은 퇴출의 상처로 삶 자체가'유리그릇'처럼 위태로워진 퇴직 동료ㆍ후배 도반(道伴)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유년의 기억서부터 일상의 경험, 최근 읽었거나 전해 들은 불가(佛家) 선지식들의 일화, 불교경전 및 종교 일반에 대한 이야기, 스님들이 베푼 설법도 들어있다. 세월이 가면서 그의 법문은 종교적 가르침의 경계를 넘어 삶 일반에 대한 사념으로 넓어지고 깊어진다.

-어떤 계기로 책을 내게 됐나.

"지난 해 가을에 또 금융위기라는 게 닥쳤잖아요. 비슷한 처지에 놓인 분들께 먼저 겪은 이로서 작은 위안이나마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모임의 출행 횟수도 100회를 넘겼고, 햇수로도 10년이 됐으니 기록으로 남기자는 도반들의 권유도 있었어요."

-퇴출 직후 겪었다는 갈등이나 울분을 지금 돌아본다면.

"우습고 재미있죠. 낮춰보던 이나 높이 있는 이나 언젠가는 무대에서 내려오기 마련이고, 그렇게 섞이면 누구나 군중이죠. 한때 은행원입네 하며 우쭐했던 게 우습고, 그거 잘렸다고 절망했던 것도 우습고…, 절에 다니며 공부하면서 비교적 빨리 느끼고 깨달은 것 같아요."

물론 우습다는 건 '과거의 미욱함'을 두고 한 말이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 할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

-공부는 언제 어떻게 하셨나.

"40대 들면서 건강이 안 좋았어요. 스트레스 과로였는데 다행히 승진을 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죠. 휴가를 얻어 교회 단식원도 다녀보고 틈틈이 성경 공부도 하고, 불교 경전이나 인문 철학서들을 마구 읽기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책 한 권을 안 읽었거든요.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하루 24시간도 짧은데 그 따위 책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었어요."

그는 없는 집에서 태어나 장학금 준다는 학교만 골라 다니느라 중학교는 경상도, 고교는 전라도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대학도 "학비 안 내도 될 것 같던" 중앙대 경제학과를 택해 공부했다고 한다. 그의 세대들이 대개 그랬듯 그 역시 "군 입대 이후 처음 하루 세 끼를 밥으로 먹었다."

"학력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당시 은행은 서울대 상대ㆍ법대나 연ㆍ고대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었거든요. 은행장이 신입행원 연수장에 뒷짐지고 와서는 제 자리 앞에 붙어있는 명패를 보며 '중앙대서 어떻게 여길?'하며 놀라던 시절이었죠. 그 핸디캡을 극복하려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

치질 걸려서 의자에 피가 배어 나와도 병원을 안 갔을 정도였으니까요."그러다 몸이 망가졌을 것이고 마음도 삭막해졌을 것이다. "문득 제 몸이 삭정이 같고, 마음도 마른 가랑잎처럼 느껴지더군요. 살기 위해 허겁지겁 열심히 책을 읽었죠."

-평소 '말씀'하시는 건 즐기시는 편인가.

"안 그랬어요. 그런데 마이크를 자주 들다 보니까 익숙해지데요. 집에서 혼자 연습도 많이 했고요. 이젠 마이크 체질이에요.( )" 흔들리는 전세버스 안에서 한 손으로는 선반을, 다른 손으로는 마이크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원고도 메모도 없이 1시간 남짓을 강연한다.

-그걸 다 외우세요?

"그럼요, 외워야죠. 그래야 신뢰감도 커지고 전달효과도 좋아요. 여행을 다녀오면 그 다음날부터 다음 얘기 거리를 구상합니다. 한 달 내내 뉴스와 책을 살펴보며 공부하고 연구하고 소재를 찾고, 인터넷 등을 참조해 법문의 프레임을 짜요. 그런 뒤에 외우는 거죠. 다음날이면 다 잊어버리지만…."

10년 동안, 100회를 넘기는 동안 그는 외국서 공부하던 딸 만나는 일로 빠진 한 번을 제외하고 줄곧 모임을 이끌었다. 담도에 돌이 생겨 수술을 하고도, 급성 신우염을 앓던 때에도 '하루 출가'는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이 도반들의 머리칼도 희끗희끗해졌고, 작고한 회원도 있다. 좋은 일로 바빠진 이들도 있고, 새로 합류한 이들도 적지 않다.

배우자와 자녀들이 동참하는 경우도 있고, 소문 듣고 오는 사람도 있다. 희망자가 늘면서 먼 길이 아닐 땐 버스 복도에 보조의자를 줄줄이 놓고 간다. 늙고 죽음에 대해, 종교의 가치에 대해 물었고, 그는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대답했다. 확신의 전도사처럼 열띠어 말하다가 문득 멈추며 삼가기도 했다. 내가 남을 보듯 스스로를 보는 게 깨달음이라고도 했다.

- 욕심은 없으신가.

"욕심 크죠. 이름난 친구들 앞에 서면 작아지고, 엄청난 부를 누리는 동창이 부럽기도 하죠. 지금 내 명함 내보이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으니 살아온 삶에 대한 아쉬움이나 반성도 있고,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아직도 하루에도 몇 번씩 욕망이 일어나요. 하지만 이대로가 내 운명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다독이죠.

책이 나온 뒤 몇몇 신문에 소개된 걸 봤는지 한 유력 인사는 대통령 직속 평통자문회원인가에 들어오라고 제안하기도 했고, 지방자치단체서도 무슨 자문위원을 맡아달라고 청하더군요. 그거 다 사양했어요. 제 길이 아니라 여겼거든요."

정작 반가운 일은 이름없는 독자들의 '하루 출가' 동참 요청이다. "줄을 섰어요. 다들 딱한 처지에 놓인 분들이죠. 완강하게 청하는 분들을 위해 늘 참가하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 너덧 자리는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정씨와 그의 도반들에게 하루 출가 버스는, 프랜시스 버넷의 동화 속 고아소녀 메리의 '비밀의 화원' 같은 곳 아니었을까. '사오정' '오륙도'라는 살벌한 조어들조차 낡게 한 10년의 추락을 일상으로 버텨낸 이들, 버텨내고 있을 이들의 '비밀의 화원'은 어떤 모습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