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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3]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

여객전무 2009. 9. 29. 13:00
[최윤필 기자의 바깥] <3> 군무 발레리나 안지원씨
'그늘진 자리'에서 무대를 빛내주다
"주역을 돋보이게 하고, 박자·호흡까지 챙기는 고됨, 들러리로 여기면 서운하죠"
"뼈 금가도 진통제 먹고 공연, 관객 한 명 시선만으로 행복, 은퇴후 대안 많지않아 고민"

walden@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이야기 투로 시작해보자. 여리고 수줍음 잘 타는 한 소녀가 있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내성적인 성격도 고칠 겸 소녀를 동네 발레 교습소에 데리고 간다.

초등 3학년. 소녀는 처음 보는 분홍빛 비단신(토슈즈)과 하늘하늘한 선녀옷이 예뻐서 금세 재미를 붙인다. 소질이 있었던지, 3년 뒤 소녀는 서울예고 콩쿠르에서 금상을 타고, 이듬 해 예원학교에 입학, 중3이던 1995년에는 한국발레협회 콩쿠르에서 다시 금상을 거머쥔다.

훌쩍 자란 키만큼 꿈도 자란 그 즈음의 소녀는 화려한 프리마 발레리나로서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리게 된다. 발레의 세계를 더 알게 된 만큼 연습량은 늘어나고 훈련 강도는 세진다.

그 재능과 끼를 눈여겨본 한국예술종합학교의 한 교수가 소녀의 유학을 주선한다. 러시아 정통의 바가노바 발레학교. 3년 여의 힘든 과정을 마치고 2002년 귀국한 소녀는 곧장 유니버셜 발레단에 입단한다.

아이 엄마가 됐어도 모자라지 않을 나이에 이른 지금의 그녀는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꿈을 꿔왔을 이삼십 명의 발레리나들과 더불어, 꿈꾸던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 공주가 아닌 이름없는 백조 무리의 일원으로 군무를 춘다. 세상 어디나 그렇듯, 발레의 주역도 선택된 극소수의 몫이다.

경력 19년차 발레리나 안지원(28)씨. 그의 역할은 코리페(coryphee)다. 대개의 발레단은 배역에 따라 크게 프리마 발레리나- 솔리스트- 코리페-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의 서열로 조직되어 있다. 프리마 발레리나는 알다시피 주역이다. 솔리스트는 비중 있는 조연, 코르 드 발레는 군무(群舞) 혹은 군무자를 뜻한다.

코리페는 군무의 리더란 의미. 코르 드 발레 가운데 경험 많고 기량이 뛰어난 무용수가 주로 맡는다. 자신의 춤뿐 아니라 군무의 박자와 호흡까지 챙겨야 하는 힘든 배역. 주역이나 솔리스트는 자신의 춤만 연습하면 되지만, 가끔 솔로 춤도 춰야 하는 코리페는 연습해야 할 양이 그만큼 많다.

그를 만난 것은 발레단 연습실 입구에서였다. 막 오전 연습을 마친 얼굴에는 다 훑어 모으면 소주잔 하나쯤은 너끈히 채울 만큼의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인터뷰는 태어나서 처음 해봐요, 대답을 잘 해야 하는데…."

연신 심호흡을 하며 가쁜 숨을 달래면서도 그는 땀을 닦지는 않았다. 화장이 지워질까 봐 염려하는 듯했다. 카메라가 그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레 보시는 분들은 대개 주역을 보고 오시잖아요. 코르 드 발레는 '들러리'쯤으로 생각하기 쉽죠. 발레단 안에서조차 그렇게 여기는 이들도 없진 않아요. 그러면 정말 안 되는데…."

엔진의 핵심 부품인 실린더와 피스톤이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밸브나 샤프트 없이는 제 기능을 못하는 것처럼, 군무 없는 발레도 없다. "주역을 돋보이게 하고 공연을 웅장하게 받치는 역할이죠. 하지만 좋은 군무는 그 자체로도 여느 솔로나 파드되(pas de deuxㆍ이인무) 못지않게 환상적이에요. 군무를 보러 공연장에 온다는 분들도 계세요."

코리페인 그는 공연 중에도 말을 많이 한다고 한다. "앞뒤좌우로 곁눈질하면서 군무진의 위치를 조정하고 숫자를 세면서 박자를 맞춰요. 시선이나 목의 각도 발의 위치 하나하나가 마치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하거든요." 물론 관객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할 순간의 타이밍을 맞춰서요." 작은 실수 하나에도 공연 전체가 흐트러지기 일쑤인 게 발레다.

"얼마 전에 했던 '라 바야데르'는 장기 공연이었어요. 3막까지 약 150여 분 내내 군무는 거의 못 쉬어요. 3막쯤 되면 숨이 턱에 닿는데 솔리스트가 춤을 출 때도 군무진은 각자의 포즈로 정물처럼 무대 위에 서 있어야 해요. 땀이 눈에 들어가고 다리도 저리고 발에 쥐가 나기도 해요."

그래도 움찔거려선 안 된다. 그건 노하우가 아니라 인내심이라고,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누가 살짝만 흔들려도 금세 눈에 띄거든요. '쟤는 가만히 서있지도 못 하냐'고 말할지 몰라요. 물론 그건 해서는 안 될 실수죠. 그래도 몸의 본능적 반응에 저항하는 일이 쉽진 않아요. 그럴 땐 정말 서러워요."

그의 말처럼 발레는 고전적 엄격미의 한 극단에 있는 예술이다. 정형화한 마임이 있고, 엄격한 테크닉이 있다. 몸짓과 동선은 물론이고, 몸의 맵시조차 그 규범적 아름다움에 최대한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간적 무대는 넓어도, 발레리나가 누리는 운신의 공간은 극히 제한적이다. 안무자의 지시에 따라 수십 명 많게는 백여 명의 출연자들이 정교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 숨막히는 틈 안에서 각자의 기량과 표현의 개성을 극대화하는 몸짓이 발레다. 요컨대 고전 발레의 화려함은 절제의 화려함이고, 그 우아함은 규율의 우아함이다.

물론 출연자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운신의 여백은 배역에 따라 다르다. 주요 배역일수록 넓고, 주목을 덜 받는 배역일수록 개성을 발휘할 여지는 적다. 코르 드 발레가 그렇다.

발레리나에게 몸은 연주자의 악기다. 그 '악기'가 우선 좋아야 하는데, 아름다움의 기준은 일상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발레교본에는 길고 가는 다리와 곧게 아래로 가늘어지는 각선미, 작고 납작한 엉덩이와 골반, 우아한 목과 윤곽이 뚜렷한 등, 평평한 복부와 작은 가슴을 최적의 체형으로 꼽고 있다.

실제로 발레리나의 가슴은 서럽도록 작은데, 어떤 책에는 '뼈 위에 가죽을 살짝 덮은 정도가 이상적'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발레리나에게는 보편의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 없을까. "어떨 때 연습실에서 동료들끼리 그런 말은 가끔 해요. '어, 이게 뭐야, 이제 가슴도 없어졌어' 그런 말…. 평소엔 별로 의식을 안 해요. 살 찌면 안 되니까 잘 못 먹고, 입에 단내 나도록 뛰고 구르다 보면 그나마 있던 지방도 빠지죠.

어느 날 문득 자신의 몸이 낯설게 보이기도 해요." 그 때의 심정이 은밀한 성취의 기쁨만은 아닐 것 같았다. 문 씨도 "그렇다"고 했다. 점심 시간이 따로 없기 때문에 굶기를 밥 먹듯 해서 배고픔은 일상이라고, 속쓰림도 일상화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아침은 선식이나 미숫가루로 때우니까 제대로 된 식사는 저녁 한 끼예요."

-'고통은 친구'라는 말이 있던데.(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강수진씨 인터뷰에서)

"뼈에 금이 가도 진통제 먹고 춤 추는 일은 흔하죠. 저도 발목이 별로 안 좋아 약 먹고 무대에 선 적은 많아요. 공연할 땐 모르는데 끝나고 집에 가면 아파요. 아침에 보면 퉁퉁 부어있기 일쑤고, 좀 무리하면 다리로 통증이 타고 올라오기도 하고…. 발레리나가 아픈 데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어디든 아픈 게 자연스러운 일이긴 해요. 하지만 강수진 씨는 무서워요.( ;)"

-강수진씨 발 사진을 보고 놀란 적이 있는데.

"전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발 생김새에 따라 변형의 정도가 달라요. 가령 둘째 발가락이 엄지보다 길면 고통이 훨씬 심하고 물집도 잘 잡히죠."

발레단에 입단한 뒤 고정 레퍼토리인 '춘향' 초연을 끝내고 문씨의 오른쪽 엄지발톱이 가로로 쪼개져 결국 빠진 적이 있다고 했다. "반창고로 단단히 동여매면 좀 불편하고 아프긴 해도 춤을 못 출 정도는 아니에요."

-급여는 어느 정도.

"등급마다 다른데 저는 월 200만원 정도예요. 수석 발레리나는 300만~350만원 정도 될 거예요." 생각보다 적은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런가요? 그래도 춤이 좋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언제까지 할 계획인가.

"체력이 되는 한 하고싶죠. 외국은 나이 든 발레리나가 워낙 많아서 자연스러운데 우리는 좀 달라요. 35세 정도면 점차…, 배역에 따라 차이는 있어요. 주역은 조금 더 있을 수 있고요. 그래서 더 결혼도 미루게 되는 것 같아요. 애 낳고 무대에 서는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은퇴 후에는?

"대안이 많지는 않아요. 동료나 선배들 보면 현대무용을 하는 경우도 있고, 요가나 필라테스 강사 자격증을 따기도 하고, 발레 개인 교습소를 열기도 하고, 아예 무대장치 쪽 공부를 하는 분도 있죠. 전 대학을 안 갔으니 학위를 따서 그 쪽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문씨는 유니버셜에 입단하던 그 해 가을에 심한 발목 부상을 당한다. 그런 뒤 겨울 내내 공연은커녕 연습도 못했고, 두려워서 저울에 서지도 못했다고 한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주위에서는 '그 일만 없었다면 어쩌면 문씨의 배역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주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주역이 되려면 기량과 끼도 뛰어나야 하지만 타고난 몸매와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고 입단 타이밍 등 여러 변수들도 잘 어우러져야 한다. "가끔 아버지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으세요. 이번 배역은 뭐냐고요. 말씀은 한 번도 안 하셨지만 서운하고 안타까우신 것 같아요. 그럴 때 죄송하죠."

그나 그의 동료들이 한나절 만에 토슈즈가 망가질 정도로 몸을 혹사해가면서, 별로 주목 받지도 못하면서 한사코 무대에 서는 것은, 당장은 춤이 좋아서일 것이다. 그리고 비단 분홍신 처음 신으며 품었던 화사한 꿈이 여전히 바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들 발레를 앙상블의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객석을 메운 수천 개의 시선이 모두 주역에게 쏠릴 때 그 중 몇 개는 그늘진 자리의 '나'를 주목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서 본 다른 주역이나 솔리스트들이 절보고 제일 예뻤다고, 잘했다고 칭찬해줄 때 가장 행복해요." 완벽한 발레 앙상블이란 문씨가 그러하듯, 수십 수백의 모든 무용수가 제 배역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춤을 추어야 완성되는 것일지 모른다.

'춤은 모든 언어가 끝난 뒤 비로소 시작되는 언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궁극의 상징, 절정의 교감이라는 의미쯤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춤의 언어는, 공연이 끝난 뒤 비로소 열리는 무대처럼, 모든 몸짓이 멎은 뒤에야 고요히 시작되는 교감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분홍신 챙겨 들고 다시 연습실로 향하는 안씨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