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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기자의 바깥 [20] 풀피리

여객전무 2009. 11. 9. 18:45

 

 

문화

[최윤필 기자의 바깥] <20> 풀피리
이 땅의 民草처럼… 바람을 노래하고 江을 품었네
'악학궤범'엔 어엿한 전통악기… 무대서 밀려 천연 호루라기로
무형문화재 연주가 오세철씨, 농사일 틈틈이 작곡·음반 내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한탄강의 물빛은 이맘때부터 깊어진다. 어지럽게 부유(浮游)하던 것들이 세찬 여름 물살에 얹혀 흘러가버리고, 가라앉아 휘돌던 것들도 물때를 입어 기척 없이 고요해지는 계절. 강은 세상 모든 것들을 투명하게 수용하면서 야위어진 몸을 정교하게 입체화한다. 보아주던 이들이 다 떠나간 뒤에야 강은 비로소 강이 된다.

경기 포천시 영북면 자일2리 오세철(52)씨의 집에서 한탄강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었다. 그 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그는 풀잎 하나를 뜯는다.

"무서리를 살짝 맞아야 풀잎이 쫀쫀해져요. 지금쯤부터 된서리가 내리고 강이 얼기 전까지의 풀피리 소리가 가장 쫄깃쫄깃하죠."

소리의 쫄깃함을 맛이나 보라는 듯 그는 청가시라는 그 풀잎을 물고 '청성곡' 한 자락을 들려줬다. 끊길 듯 가늘어지다가 구비에서는 힘지게 휘감아 넘고 여울 지나는 물소리처럼 시김새 현란한 자진모리로 요동치는 듯하더니 이내 바람소리처럼 처연한 한숨으로 잦아든다.

풀피리 소리 자체를 처음 듣는 문외한의 귀로 그 계절별 음색과 질감의 차이를 따진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 다만 물빛 같고 풀빛 같은 그 청아함에 멍해져서는 먼 이국의 강 구비에서 뭇 뱃사공의 넋을 홀렸다는 전설 속 요정의 노래가 저러했을까 상상했을 따름이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득하니 끼끗했고, 풀피리의 가락처럼 강물도 '쫄깃하게' 흘렀다.

풀피리가 어엿한 전통 악기라는 사실을 안 것은 불과 20여일 전이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한국음악사'를 듣는다는 독자가 "풀피리가 '악학궤범'에 향악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걸 강의를 듣고 알게 됐다"며 그걸 한 번 소개해보라며 이메일로 제안한 것이다.

과연 '악학궤범'은 풀피리를 초적(草笛), 초금(草笒)의 이름으로 현금, 향비파, 가야금, 대금 등과 함께 버젓한 향악기의 하나로 그 주법과 함께 소개하고 있었다. "복숭아나무 잎을 말아 불며 나무 잎을 물어 휘파람을 부니 그 소리가 맑게 진동하는데 귤나무 잎이나 유자나무 잎이 좋다… 나무 잎 상면(반질반질한 면)을 말아 입에 물고 불면 소리가 윗입술로부터 나는 것이니…"

오세철씨는 풀피리 경기도 무형문화재 38호로 등재된, 주력 35년의 베테랑 연주자다. 그에 따르면 풀피리는 인간의 감정과 기량을 가장 솔직히 전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악기다. "입에서 나오는 음률을 풀잎이 제 몸을 떨어 연주음으로 만드는 겁니다." 풀잎 뒷면을 반듯이 펴 팽팽히 당기면 잎 끝이 바깥쪽으로 살짝 오므려지는데, 아랫입술로 풀잎을 깨물 듯 고정하고 윗입술을 살짝 얹어 그 사이로 입김을 뿜어내는 게 주법의 기본. 풀잎에 부딪쳐 입 안으로 되돌아오는 입김과 풀잎 끝을 진동시키며 바깥으로 터져나가는 입김이 공명함으로써 소리를 만드는 듯 보였다.

서양악기든 국악기관악기든 현악기든, 운지(運指)와 타현(打絃)에 법식이 있고 악기 자체의 고유 음색과 음가가 있지만, 풀피리는 입김의 강약과 목청의 떨림에 제 음가를 고스란히 내맡긴다. 음색도 풀잎의 종류와 계절에 따라 다르고, 심지어 부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사물이나 현상의 의미는 더러 그 자체보다 덧씌워진 이미지에 좌우된다. 풀잎은 질긴 항거의 정신과 슬기로운 처세의 표상으로 흔히 환유된다. 백성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민초(民草)라는 명사가 그렇듯, 그 이미지 속에서 낱잎 하나하나의 고유명사는 무의미하고 의도적으로 덮이기도 하는데, 풀피리 역시 그냥 풀피리일 뿐이지 무슨무슨 풀피리는 무의미해진다. 옛 동화책에 등장하는 목동들의 호드기도, 꼴 베는 아이들의 풀잎피리도, 버들피리 보리피리도 모두 풀피리이고, '연산군일기'로 전해지는 바 연산군이 장녹수 등과 궁궐 후원에서 불며 놀았다는 초적도 모두 하나의 풀피리다.

'악학궤범'의 시대에는 달랐겠지만, 언젠가부터 풀피리는 무대가 아닌 변두리 삶의 수수한 치장 정도의 이미지로 왜소해졌고, 악기로서의 가능성 역시 삑삑대는 천연 호루라기 수준으로 천시됐다. 사방에 지천으로 널린 풀잎이 그 자체로서 악기가 된다는 미덕(!)도 싸구려 이미지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풀피리 연주의 기량은 '재주'나 '묘기'일 뿐이다.

"풀피리로 소화하지 못할 음악은 없어요. 동서양 여느 악기 못지않게 음역도 넓고 기량만 갖추면 음가도 정밀하게 구사할 수 있거든요." 오세철씨가 가장 좋아하는 풀잎은 개복숭아 잎이라고 했다. "지금은 지고 없지만 개복숭아 잎이면 서양 음계로 세 옥타브 이상 나옵니다. 국악 관악기 가운데 제왕처럼 떠받들리는 대금의 음역도 두 옥타브 반에 머물잖아요."

인터뷰 중간중간 그는 자신의 삶의 이력과 풀피리와의 인연, 독공 시절의 에피소드, 연주 경험과 경력 등을 이야기했고, 그 사이사이 '청성곡'이나 '영산회상' 같은 버젓한 대금 정악 독주곡이나 흘러간 대중가요의 한 자락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의 풀피리는 때로는 갈대 속청을 떨며 내는 대금처럼 청아했다가 아쟁처럼 낮고 느리게 흐느꼈고, 해금의 꺽진 듯 애잔한 소리를 닮아가기도 했다.

"농사나 착실히 배우라며 선친께 얻어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죠. 어른도 소리를 좋아해서 지역 명창 소리는 들으셨는데 당신 생각에 창이든 악기든 소리에 한 번 미치면 잘 풀려야 건달이라는 거였거든요." 중1 때 스승을 만나 주말마다 50리 길을 오가며 배우던 기억, 어른 감시 피해 여름이면 아카시아 잎으로 겨울이면 방에서 키운 고구마 잎으로, 이도 저도 없으면 '라면땅' 비닐포장지로 독공하던 기억, 어깨 너머로 배운 창 실력으로 1978년 KBS 민요백일장에 나가 '뱃노래'로 입선하고 풀피리 '한오백년' 연주까지 과시했던 일, 군대 갔다 와서 장가 들고 한동안 마음 잡고 농사에 매진하던 시절의 이야기…. "새참 때마다 동네 어른들이 풀피리 불라고 늘 성화를 해대는데, 흥이 나면 오후 나절을 풀피리만 불기도 했죠." 가을걷이 끝내고 한가해지면 하릴없이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는데, 하루는 아내가 그러더란다.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살 만하고, 그 농사 내가 지을 테니 당신은 나가서 그 좋다는 소리를 하든 풀피리를 불든 하소."

꼭 10년 전인 1999년 6월. 모내기를 끝내자마자 그는 서도소리 명인 이은관씨를 찾아간다. "포천, 철원, 연천… 이 동네가 희한해요. 실향민이 많아 황해도 평안도 서도소리에 능한 이들이 많아요. 거기다 강원북ㆍ동부의 메나리가락도 어려서부터 귀동냥으로 익힌 터였고요." 서도소리가 콧소리를 섞어가며 간드러지게 휘감아 든다면, 메나리 가락은 강원도 산골의 메아리처럼 삭혀서 울려내는 장중한 꺾임이 매력이다. 스승과 함께 서도소리의 정수라는 배뱅이굿 완창 공연도 했다는 그의 방에는 '서산 낙조~'로 시작되는 1만4,000자 배뱅이굿 가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그 배움은 우리 가락의 깊이와 멋을 더 깊이 알게 했고, 곧 풀피리의 기량으로 깊어졌다. 사사한 지 한 해 남짓, 2000년 11월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국악관악기 연주회가 있었는데 우연찮은 기회로 그는 풀피리를 들고 출연한다.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연도 하고 명창 반주도 하고, 독주도 하고…, 전체 공연 60여분 중에 25분 동안 풀피리를 불었어요." 그 연주 이력을 인정받아 이듬해 그는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됐고, 그간 남들이 알아주진 않아도 850여회라는 공식ㆍ비공식 연주경력을 쌓았고, 100여명의 제자도 길렀다고 한다.

요즘 그는 농사일 틈틈이 강연이나 공연도 하면서 풀피리 연주곡을 짓는다. 이미 산조 한 곡과 봉장취(소쩍새 솔부엉이 꾀꼬리 뻐꾹새 접동새 등의 사랑놀이를 자진모리 가락으로 연주하는 즉흥곡), 경기민요의 구성진 이별가조에 메나리가락을 섞은 오세철류(流) 한탄강 아리랑을 작곡했고, 경기문화재단에서 얼마간 지원을 받아 음반도 냈다며 또 한 가락씩 선을 뵀다.

그는 하고픈 이야기도, 들려주고픈 가락도 많은 듯했고, 세상이_특히 각 음악대학들이_ 풀피리를 지금보다는 좀 더 버젓하게 대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정규 전통 기악의 한 갈래로 인정해 강의와 전공과정을 개설해 주법의 맥을 잇고 후진도 양성해야 한다는 거였다.

물론 그것도 그런대로 반가울 일이지만, 지금 이대로도 그리 안타깝진 않았다는 게 솔직한 내 느낌이었다. 그의 풀피리 소리가 경이로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본에 갇히지 않음으로써 더 자유롭고 풍성한 풀피리 소리들이 만들어질 것 같아서였다. 내가 들은 그의 풀피리 연주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그가 한탄강가 논두렁을 걸으며 격식 없이 불었던 두툼한 바람소리 같은 이름 모를 가락이었다. 강처럼 풀잎도 가을로 깊어가고 그의 소리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