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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 [18] 자선활동가 김영우

여객전무 2009. 10. 21. 18:15

 

 

 

문화
[최윤필 기자의 바깥] <18> 자선활동가 김영우
'사랑통장'잔고 차고넘치는 아름다운 휴머니스트
은행간부 퇴직후 사회복지사로 새 인생… 집 팔고 사비 털어 탈북청소년 등 후원
사별한 아내와의 약속으로 시작했지만… 그냥 그런 사람도 있더라 하면 만족해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그를 알게 된 건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본보 8월 18일자 '바깥' 9회)를 취재하면서였다. 스무명 가까운 학생ㆍ교사들이 난방도 안 되는 손바닥만한 반지하 셋방에서 겨울을 나야 할 처지였는데 한 '산타클로스'가 도와 그처럼 버젓한 공간을 마련하게 됐다는 게 그 사연의 요지다. 그 산타클로스는 시중은행 부행장을 지냈고, 투병 중이던 아내와의 약속대로 봉사의 여생을 살고자 퇴직 후 복지대학원에 진학했고, 우연찮게 학교 사정을 알고는 도움을 줬다는 거였다. 그가 김영우(60)씨다.

"가볍게 한두 마디 나누는 자리에서 '이런 사람도 있더라'는 정도로 언급되면 딱 알맞은 이야기"라며 그는 우리의 초대에 연신 움츠렸고, 이 마당이 '그런' 분들 모시는 자리라고 한 뒤에야 "그럼 차나 한 잔 하자"며 응했다. '그런'의 의미를 우리는 사연의 진정성에 두었지만, 그는 사연의 경중에 연루된 관형어로 여겼을 것이다.

밀레니엄의 희망과 불안으로 온 세상이 어수선하던 2000년 1월 1일의 새벽을 그는 가족과 함께 한 장애인 목사가 운영하는 시각장애인 자활가정에서 맞이했다고 한다. "봉사의 약속이랄까요. 가족끼리의 선언 같은 의미였어요."

며칠 뒤 그는 승진 서열을 깨고 그 해 외환은행 정기인사에서 종합기획부장에 발탁된다. 별 과오가 없는 한 임원 승진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자리다. "은행 인사는 아주 보수적이거든요. '금융계 서열파괴'라는 식의 제목으로 일간지에 보도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도 그의 아내도 한껏 고무됐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여 뒤 그는 감기가 오래간다며 동네 약국 신세만 지려던 아내의 손을 끌고 병원을 찾는다. "아내는 간호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고 큰 병원 수간호사까지 한 사람이었어요. 삼성의료원 간호과장이 그 사람 후배였는데 진찰 결과를 보더니 대뜸 말 없이 웁디다." 신장암 말기. 암세포가 뼈와 간으로 전이된 상태였고, 의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3~6개월'의 시한부 진단을 내렸다.

꼭 130일 뒤 아내는 숨을 거뒀고, 그는 그 사이 직장을 휴직하고 오롯이 병실을 지켰다. "큰 아이는 군대에 있었고, 고3이던 작은 아이는 지방 기숙사학교에 있을 때였어요." 여느 보호자들처럼 그도 기적을 기대했고, 아이들에게 엄마의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짬짬이 암 관련 서적과 기적의 풍문들을 쫓아 다니는 동안에도 암세포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내는 혼수상태로 빠져든다. "그제서야 아이들을 불렀어요. 의사는 고단위 스테로이드 주사를 처방했고, 아내는 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털어 아이들을 걱정하는 두어 마디를 남긴 뒤 숨을 거두더군요."

병실을 지키는 동안, 그와 아내는 죽음을 떠올릴 만한 그 어떤 말도 나누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당신 가면 당신 이름으로 고아원 하나 지어 아이들 돌보며 살겠노라'고, '그 아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복직 후 틈틈이 관공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아봤더니 보육원 시설은 남아돈다는 겁니다. 구태여 새로 짓는 게 무의미하다는 얘기였어요. 기존 고아원 시설과 장애인 단체 등을 다니며 봉사하면서 계획을 다시 따져보기 시작했어요."

서울대 법대(70학번)를 졸업하던 그 해(1974년)에 취직해 꼬박 30년을 다닌 외환은행이 2003년 11월에 론스타에 넘어간다. 그 사이 상무를 거쳐 부행장으로 승진한 그는 론스타의 돈이 들어온 지 일주일 만에 사표를 써야 했고, 그 길로 강남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입학원서를 쓴다. "원서접수 마감이 그 전 주 토요일이었대요. 월요일에 찾아가서 사정사정해서 접수를 했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전부터 그는 봉사 현장을 찾아 다니며 이런저런 일들을 챙겨왔고, 복지사가 된 뒤로는 탈북 청소년 지역아동센터 시설장,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고문,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을 보살피는 무지개청소년센터 감사, 재단법인 꿈 미래 희망재단 이사 등등의, 돈 드는 감투를 여럿 겸직하며 그 일감들을 떠안아왔다. 그게 올해로 6년째다.

"그런 일에 관심이 있다는 분들은 많지만 지속적으로 애정을 갖고 가진 것을 나누려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아요. 이 일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도움을 청하는 곳이 여러 곳이더군요." 그 감투들이 쑥스럽다는 듯, 그는 그리 말했다.

아이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일 외에 그가 개입하는 봉사 영역은 주로 단체 운영과 기획, 그리고 공식ㆍ비공식적인 재정 업무다. 자원봉사자와 피봉사자에게 밥도 사고 이따금 상근 직원들의 급여를 챙겨줘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후원금이 적으면 직원들이 월급을 못 받는 경우도 생겨요. 대부분 그 일이 직업인 사람들이거든요. 복지사 월급이 100만원 정도 되는데, 10년 일해봐야 150만원 안팎이에요. 식구도 있고 자녀 공부도 시켜야 하는데 그 돈이 안 나오면 어떻게 생활을 하겠어요?"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다녔으니 주변에는 출세한 사람도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주 친한 친구에게도 돈 얘기는 안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제가 후원금 계좌도 더러 관리하는데,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 후원금 좀 보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슬그머니 해지해버리더군요. 부인들이 그런 거 왜 하냐고 하나 봐요. 환갑이 돼도 생활인이고 부자에게도 돈은 귀한 거니까…, 그런 게 제겐 상처가 되더군요."

한 달 지출이 어느 정도 되냐고 묻자 혼잣말처럼 "그런 것까지 말하기는 좀…" 하면서 머뭇거렸다. 기어코 들어야겠다며 입 다물고 쳐다보고 앉은 게 부담스럽다는 듯 그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어떤 달에는 1,000만원 넘게 나가기도 하고, 적을 땐 700만~800만원 정도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 돈이란 게 그렇다, 푼돈으로 여기저기 쓰다 보면 받는 쪽에서는 별 것 아니어도 쓰는 사람은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사정 딱한 거 뻔히 보면서 나몰라라 어떻게 하나, 여기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봉사자들 대부분이 봉사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나 같은 사람이야 돈 잘 벌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살다가 덤으로 이 일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정서적 사치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헌신적이고 따듯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 배운다 …

이왕 시작한 김에 다 말할 테니 가려서 들어보라며 그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 형제에게도 말하지 못했다는 사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제가 당신을 포함해서 일곱인데 하나같이 공부도 잘 하고 많이 한 이들이 생활은 그렇게 무능했다는 이야기, 대식구 살림을 거의 도맡아 하느라 아내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이야기, 은행 지점장으로 있던 90년대 중반까지 당신의 가계 통장은 줄곧 마이너스였다는 이야기, 그런 아내가 병원일 그만둔 뒤에는 반찬값이라도 보태겠다며 학습지 판매 부업까지 했다는 이야기…. "그 사람, 떠나던 순간까지 내게 단 한 마디도 원망을 안 했어요. 그게 지금까지 이렇게 회한으로 남습니다."

그런 부인과 사별하고 스스로 정한 예에 따라 3년상을 치르고, 다시 1년여 뒤인 2004년 11월, 그는 재혼한다. 젊어서 이민을 가 미국서 살던 교포인데 남편과 사별한 뒤 남편 이름의 장학재단을 만들어 9년째 매년 2만달러씩 유학생 스무 명에게 장학금을 나눠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퇴직금은 물론이고 집 판 돈, 심지어 아내 장례식 부줏돈까지 다 써버린 처지라 지금의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크게 기대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꼭 아내와의 약속 때문에 제가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 상처나 충격, 질병 등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이런 일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고, 저의 경우도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게 바람직하지는 않지요. 어려서부터 부모의 삶을 보면서 배우고, 느끼면서 봉사의 가치를 체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부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균적인 봉사가 보편화하는 게 더 좋은 세상이잖아요. 근래 각급 학교에서 봉사활동이 활성화하고 있고 나름 의미있는 변화지만, 진학과 학점에 도움을 받고자 개입하는 이들도 적지 않죠."

그는 앞으로는 봉사도 절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정략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본의 아니게 지금 아내에게 재정적으로 너무 의존하게 됐어요. 물론 아내도 흔쾌히 동의하는 일이지만, 어떨 땐 제 마음이 불편해져요. 돈 덜 쓰고 봉사할 수 있는 일들, 이를테면 제가 가진 사회적 경륜이랄까 하는 것들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가급적 덮어두는 게 좋다"고 말했다. 자칫하면 미화되기 쉽고, 거꾸로 폄하될 수도 있다. 미화돼서 좋을 것도, 폄하돼서 불쾌할 것도 없지만, 어쨌든 자신의 이야기가 알려짐으로써 스스로는 또 하나의 짐을 지게 되는 것 아니냐고 그는 말했다.

그래도 그를 굳이 드러내려는 것은 그가 벌여온 일이 거창해서도, 그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여서도, 그의 사랑이 세상의 귀감이라 여겨서도 아니다. 그처럼 요란스럽지 않게 묵묵히 선행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다는 것,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하도 많아 금세 세상이 어찌될 것 같다가도 어찌되지 않고 버티는 게 바로 '그런' 이들이 적잖이 우리의 이웃으로 버텨주고 있어서라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일단은, 자랑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