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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16] 손 모델 최현숙

여객전무 2009. 10. 6. 10:45

 

[최윤필 기자의 바깥] <16> 손 모델 최현숙
얼굴 없이 10년 동안 소비자를 유혹한 그녀의 손
톱스타들 CF 대부분 대역… 요즘 매주 두 차례 정도 촬영
관리 비결은 뭘 어떻게 하느냐보다 뭘 안하느냐가 중요
집안일 대신 해주시는 어머니와 남편·딸에게 항상 미안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수개월 전 끌을 만지다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심하게 베여 쉰 땀 가량을 봉합한 적이 있다. 상해보험 들어둔 게 기억 나 보험사에 연락했더니, 약관상 손은 아주 못 쓰게 되거나 하는 경우가 아닌 한 보험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긁히고 베이고 부러지는 게 일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손은, 기능적으로 보자면, 더 연약하고 고귀한 신체의 어떤 부위가 거칠고 더러운 세상과 바로 대면하지 않도록 앞장서는 전장의 척후병 같은 기관이다. 그래서 우리 몸의 부위 가운데 가장 빨리 늙고 그 늙음의 기세를 늦추거나 감추기 가장 힘든 부위가 손이라고도 한다.

손은 지식이 실재와 만나는 접점이다. 손은 가장 먼저 세상을 감각하고 가장 깊이 교감한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감지하기 전에, 손은 접촉한다. 손은 또 가장 마지막으로, 전면적으로 세상에 개입한다. 수많은 참여문학 작품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해온 손이 바로 그 손이다.

그리고 손은 가장 다양하고 화려하고 솔직한 표정을 지닌 기관이다. 가령 연애에 서툰 숙맥이 어렵사리 사랑하는 이성의 손을 쥘 때 마음이 제어하지 못하는 미세한 떨림, 혹은 손바닥에 밴 촉촉한 물기는 그 어떤 미사여구의 고백보다 아름답고 엄숙한 선언보다 진솔한 언어가 된다.

프랑스 건축가 앙드레 보겐스키는 그의 스승 르 꼬르뷔제를 추억하며 쓴 수필집 제목을 <르 꼬르뷔제의 손-Les Mains de Corbusier>이라 달고 이렇게 적기도 했다.

"위엄 있으면서도 수심에 잠긴 얼굴에서는 거리감이 느껴지곤 했다. 얼굴에서 손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비로소 나는 르 꼬르뷔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은 그를 배반하려는 것 같았다. 손은 얼굴이 감추고 있던 모든 감정을, 모든 내면의 떨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현숙(29)씨는 지난 10년 동안 손의 '행위'가 아니라 '무위(無爲)'로 돈을 벌어온 손 모델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노동으로 훼손되지 않은 티없이 맑고 깨끗하고 미끈한 손의 아름다움으로 역설(逆說)의 노동을 한다.

손으로 남자 모델의 가슴을 더듬거나 얼굴을 쓰다듬는 등의 연기를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행위는 노동을 소외시킴으로써 가꿔 온 보존 행위에 대면 부차적이다. 요컨대 그의 정체성은 손의 외모에 압도적으로 의존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너의 그 게으름이 밥을 먹여줄지 어떻게 알았겠냐"고 했다고 한다.

외면의 아름다움은 대체로 타고나는 것일 테다. 대다수 사람의 손은 손가락과 손바닥의 길이가 비슷하거나 손바닥이 더 길지만, 그는 손가락이 손바닥보다 훨씬 길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관절이 돌출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손등을 위로 보이게 활짝 펼칠 때조차 군살의 밀림이나 접힘의 흔적조차 없다.

살색마저 치잣물 은근히 들인 밀가루 반죽처럼 밝고 투명하다. 가꾸기는 또 얼마나 공들여 가꿨을까. 두 살 된 딸을 둔 주부지만 그는 "집안 일, 특히 젖은 일은 친정 어머니가 거의 다 해주신다"고, "손 모델 하면서부터 그런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천성적으로 게을렀다"고 말했다.

- 언제부터 손을 주목했나.

"그런 기억은 없다. 피부가 희어서 어려서부터 친구들이 '밀가루'라고 자주 놀렸고, 손가락은 특히 가늘고 길었다. 예쁘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 같다."

- 그럼 어떻게 손 모델을 하게 됐나.

"한 광고회사 사옥 인포메이션(안내창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CF감독의 눈에 띄어 시작하게 됐다." 그 광고가 고인이 된 최진실의 모 통신서비스 광고였다고 한다.

- 모델 욕심이 있었던 건가.(그는 키 168㎝에 몸무게 48㎏으로, 몸매 역시 모델로도 그리 빠지지 않을 듯했다)

"인력파견업체에서 보내는 대로 가서 일해야 했다. 첫 일터는 삼성의료원이었고, 삼성전자, 삼성자동차 사옥 인포메이션에서도 일했다."

- 그 뒤로 전업 손 모델로 활동했나.

"한동안 프리랜서서비스 강사 생활을 했다. 기업체 등에 가서 예절교육 해주는 거다. 간간이 부분모델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하곤 했다." 그렇게 2~3년 간 일하다 보니 '손 하면 최현숙'이 돼 전업하기 시작했고, 보수도 조금씩 늘어났다고 한다.

- 얼마나 버나.

"손이 클로즈업되는 빈도나 분량, 손 연기의 난이도에 따라 다른데, 방송 광고의 경우 단순한 건 100만~150만원, 액션이 큰 건 200만~300만원 정도 된다. 잡지 사진 모델(페이지당 7만원)도 하고, 연예인들의 신문 연예사진 대역(회당 70만원)도 한다."

- 몇 편쯤 출연했나.

"정확히는 모르겠다. 김연아, 김희애, 이나영, 이영애, 한가인씨 등의 CF 속 손은 모두 내 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요즘은 매주 두 차례 정도는 촬영 일정이 있다." 그는 손 모델로는 독보적이어서 방송 출연도 10차례 가량 했는데, 대부분 주부 손 관리 요령이나 손 모델의 직업세계를 소개하는 프로였다고 한다.

- 신분상 '주부'일 뿐 주부의 역할은 거의 안 한다지 않았나.

"거기서도 연기를 하는 거다. 그냥 내 손 보여주고, 나는 거의 안 하는 '바르는 팩'을 시연한 적도 있다."

- 실제로는 어떻게 관리하나.

"보습·영양크림 열심히 바르고, 이따금 시트팩(약 4,000원)을 사다가 붙인다. 겨울엔 미용 파라핀 마사지도 자주 해준다. 촬영 전에는 네일숍에 들러 일상적인 관리를 받는다(1회 1만5,000원)." 뭘 어떻게 하느냐보다 뭘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설거지나 손빨래 같은 게 가장 치명적이다. 거의 안 하는데 불가피하게 해야 할 경우 걸레는 말려서 세탁기로 빨고, 설거지할 땐 1회용 비닐장갑 끼고 고무장갑을 다시 낀다. 더운 물 쓸 경우엔 면장갑을 끼기도 한다."

- 힘들 때도 있을 텐데.

"다칠까 봐 걱정스럽다. 보험을 들까 생각한 적도 있는데 보상이 크지 않더라. 큰 보상 받으려면 보험금을 많이 내야 하고…. 식구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엄마께도 미안하고 남편도 가끔은 불평을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 발에는 신경 안 쓰나.

"발가락이 손가락처럼 길다고 생각해봐라. 어떻겠는가. 하이힐 신고 오래 서서 일해와서 그런지 정말 못 생겼다. 솔직히 쳐다보기 싫을 때도 있다. 차별하는 건 사실이다.(웃음) 요즘은 그래도 손에 쓰는 도구들로 발 관리를 가끔은 해주긴 한다."

그의 손은 그의 육체의 중심이고 정체성의 중심이지만, 세상에 나설 땐 그의 손이 아니라 이영애나 김연아의 손으로 표현된다. 그의 손은 이영애의 손보다 예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영애는 손도 저리 곱다"고 말한다. 그럴 때 그는 가끔 서운하다고 말했다. 그가 느끼는 서운함이란 따지자면 얼굴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손의 비애일 테다.

하지만 그 비애란 거래의 다른 이름이어서 그가 느끼는 서운함은 공식화할 수 없는 서운함이다. 요컨대 육체의 미와 그 사용ㆍ교환가치에 구현된 자본주의적 지배-종속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그와 그의 일에서 발견하게 된다.

사회적ㆍ경제적 과실에 대한 응당한 보상이나 권리, 지분 따위를 따지는 일이 자본주의적 정의이고 운영의 핵심 원리라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주 완곡하게 표현해서, 누군가의 서운함을 당연하다는 듯 전제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최현숙씨의 손이 얼굴 없이 빛날 때, 또 마사지사의 섬세한 보살핌을 누릴 때, 그의 발도 어둠 속에서 공식화하지 못하는 서운함으로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