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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9]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박상영 교장

여객전무 2009. 9. 29. 13:14

 

 

 

사회
[최윤필 기자의 바깥] <9> 탈북청소년 대안학교 '셋넷학교' 박상영 교장
"전 아이들에게 북한 사투리 쓰라고 해요, 닮지말고 넘어서라고…"
검정고시 치고 MT간 날, 스물세살짜리가 우는 거예요, 태어나서 처음 행복 느꼈다고
통일? 그런데 관심없어요, 끔찍한 일 겪은 어린 영혼들에 그저 아름다운 기억 남겨주고파
상처의 실체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증상에 개입해야 할 때처럼 특별히 섬세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차별이 그런 경우다. 차별 현상을 해석하고 지향과 해법을 모색하는 일은, 논리의 정연함 못지않게 논리의 품격을 요구한다.

차별의 낮은 편을 편든다면서 가지런히 빗질된 이성만으로 덤벼들어 상처를 후벼파고 차별의 구조를 굳히는 데 부역하는 예는 흔하다. 누구나 개입할 수 있지만 아무나 제대로 개입하긴 힘든 저 화사한 모순의 화단 안에서, 차별은 자란다.

이번 바깥의 손님은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셋넷학교'와 그 학교 박상영 교장이다. 알다시피 탈북민들은 입국 후 3개월 간의 정착교육을 받는데, 청소년들은 '하나둘학교'라는 곳에 머문다.

북-남의 경계를 건너는 데 석 달의 기간이 적당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길어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을 테니 덮어두자. 어쨌든 현실은 석 달이고, 그 석 달의 기간이 충분하지 않아 대한민국의 현란한 교육ㆍ사회 시스템에 스며들지 못한 채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다쳐 에돌고 웅크리고 급기야 숨어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게 또 하나의 현실이다.

셋넷학교는 이들을 거두어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설 수 있게 돕는 '징검돌'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섬세해야 한다. 진학ㆍ취직을 위한 학습 못지않게, 낯선 사회에 대한 이해 못지않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다시 나설 수 있는 당당한 자신감과, 불편한 시선들에 주눅들지 않을 유연한 자기긍정이다.

셋넷학교는 현재 운영중인 5곳의 민간 탈북 청소년 학교 가운데 사실상 가장 오래된 곳이고, 종교단체의 지원 바깥에 있는 유일한 곳이며, 그래서 외형적으로 가장 허름하고 실제로도 가난한 학교다. 박 교장은 2004년 이 학교를 열었다.

서울 영등포의 한 후미진 주택가 낡은 건물 2층의 80평이 채 안 되는 공간. 19~30살 20명이 초ㆍ중등 통합반을 이뤄 생활하는 곳이다. "처음엔 난방 시설도 없는 8평짜리 반지하였어요. 아이들이 '남한에 와서 북한보다 못한 곳에서 공부할 줄은 몰랐다'고 툴툴댈 정도였죠." '아이들'은 툴툴거렸다고 한다. 주눅든 손님은 부당한 대접에도 툴툴대지 못하는 법이다.

몸에 익은 문화와 사고방식이 다르고, 구사하는 어휘도 억양도 세상 주류와 사뭇 다른 이들이다. 그 다름에 대한 악의 없는 웃음조차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는데, 세상은 꽤 자주 그들을 노골적으로 얕본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외국으로 도망쳐버린 아이들이 있어요. 여행비자 들고 입국한 뒤 여권 감추고 이민국 가서 탈북 난민이라고 신고해서 현지에 정착하는 거죠.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해서 그 녀석들을 찾아 다닌 적이 있어요. 이유나 들어보자는 심정이었죠. 거기서도 외롭고 힘들긴 마찬가질 텐데도 아이들은 거기가 좋다더군요. 다들 이방인이니까, 죄다 다르니까…. 자기 나라라고 의지하던 곳에서 깔려 사는 게 더 힘들더라는 겁니다." 개그 프로그램에 북한 사투리가 등장하는 것조차 이들은 힘들어했다고 한다.

세상의 부당한 것들을 모조리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처넣을 수는 없는 일이고, '살균 공간' 안에 이들을 격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 해답은 아이들에게는 내성을 길러주고, 세상에는 다름에 대한 이해와 문화적 수용능력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셋넷학교가 선택한 것 가운데 하나가 미디어 영상교육의 일환으로 시작된 동영상 '기나긴 여정' 제작이다.

"아이들이 살아온 이야기 하나하나가 웬만한 첩보영화 뺨칠 정도예요. 묻어두기 아까워 글로 써보게 했더니 어려워해서 비디오카메라 던져주곤 하고 싶은 말 다 해보라고 했죠. 아이들이 직접 탈북 과정, 제3국 생활, 입국 경위, 한국에서의 삶 등을 증언하고 촬영하고 편집해 만든 이 시리즈는 벌써 다섯 편이 제작됐고 지지난 해부터 일반 학교와 단체 등을 돌며 상영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한 아이들 중에는 자신을 감춘 채 중국 유학생이라고 속이고 사는 애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전 아이들에게 사투리 그대로 쓰라고 해요. '마이클 잭슨이 아무리 잘나도 백인은 안 되는 것처럼, 너네도 아무리 서울말 흉내 내도 남한 사람 안 된다, 닮으려고 하지 말고 차별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해줘요."

캠프며 여행을 다니며 날것 그대로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도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런 여행은 대개 남한 또래 아이들과 섞여 가는데, 때로는 불상사도 생긴다고 한다. "어디나 덜 된 녀석들이 있잖아요. '한국엔 왜 와서 우리 세금 축내냐' '너 사람고기 먹어봤냐' …. 저도 돌아버릴 정돈데 애들은 어떻겠어요?" 이따금 그는 학생들보다 더 철없이 분노하며 세상에 맞선다. '아이들'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정말 화가 나서라고 했다.

박 교장은 하지만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 사회에 대한 적의도 함께 자라지 않을까 걱정도 한다. 교육 커리큘럼이 너무 '착하고 모범적으로' 짜여진 것 아니냐,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사기꾼을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가 하는 말.

"2004년 첫 검정고시를 치른 뒤 MT를 갔는데, 그 날 밤 한 아이가 그런 말을 해요. '태어나서 처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요. 스물세 살이나 먹은 놈이 그런 말을 하는데…, 믿기세요?" 그의 음성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끔찍한 일은 충분히 겪은 아이들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그래도 아름다운 세상이다,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 이런 향기로운 시간도 있다…. 함께 지낼 시간이 짧으면 1년 길어야 2~3년인데 그런 기억을 최대한 많이 지닐 수 있게 해주고 싶어요."

인터뷰 도중 그는 또 한번 울먹였는데 자신이 NGO 활동을 시작할 즈음의 기억을 더듬으면서였다. 고려대 철학과 82학번인 그가 결혼하고 번듯한 증권회사에 취직해서 1년 반쯤 지냈을 때였다고 한다.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기며 흥청망청하던 시절이었죠. 연일 술자리였는데 어느 날 새벽 귀가길에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거세당한 느낌,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느낌…." 특전사 장교 출신에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그 험한 시민운동 판에서 20년째 억세게 굴러온 남자의 추억 속의 눈물과 회상의 눈물이 어떤 깊은 연유의 샘에서 배어 나오는 것인지 묻지 못했다.

기실 그는 외모도 화법도 꾸밈없이 우둘투둘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할 때도 이런 식이다.

_ 하루는 아이스크림을 사다 놨는데, 일하다 가보니까 녀석들이 다 먹어버린 거예요. 화가 났죠. "이 새끼들 니들만 입 있냐, 니네끼리 다 처먹었냐? 나도 먹고 싶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그는 학생들을 예사로 '이 새끼' '저 새끼'라 칭했다.

_ 또 하루는 학교에서 밥을 해먹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한 남자애가 나서더니 "선생님 앉아 계시라요" 하더니 여학생을 부르며 "야, 가서 설거지하라우" 하는 겁니다. 그 여학생도 군말없이 일어서대요. 마구 호통을 쳤어요.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어? 야, 앞으론 설거지하기 싫으면 밥 처먹지 마라." 아이들 입은 댓발쯤 나왔지만 어쩌겠어요.

그가 차별과 차별의 상처에 대응하는 '세심함'이 저러하다. 그는 차별이라는 관념 자체를 넘어선 듯 보였다. "하루는 졸업생 중 한 명이 찾아와서는 히죽거리며 묻는 겁니다. '선생님 대학 안 나왔죠?' 나왔다고 했더니 '체육 전공 하셨죠?' 하더라고요. 제가 무식해 보였나 봐요."

아주 젊어서부터 그는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를 들락거렸고, 강원용 목사가 꾸려가던 크리스찬아카데미(현 대안문화아카데미) 출신 선배들에 대한 동경을 키워갔다고 한다. "당시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일하던 극작가 이강백씨가 제 선배예요. 그에게 제 직장생활 고민을 털어놨더니 얼마 뒤 저를 덜컥 상근 활동가로 추천한 겁니다.

엉겁결에 시민운동과 연을 맺게 된 거죠." 그게 1991년, 결혼한 지 2년도 채 안 된 때였다. 그러다 대안교육 일을 하게 되고, 탈북 청소년들의 사정을 알게 되고…, 그렇게 저렇게 지금까지 왔다고 한다.

"처음엔 교회 예산으로 교회 안에다 학교를 열었는데, 교회 어른들이 왜 예배시간이 없냐고 따지는 겁니다. 오갈 데 없는 애들 모아 공부시키면서 십자가 들이미는 건 치사하지 않냐고 맞섰죠. 그러다 뛰쳐나와 이 학교를 차렸죠. '똘배학교'라고 제가 이름을 단 그 학교는 몇 달 뒤 없어졌어요."

300명 가량 되는 후원자들이 매달 보내주는 소액 기부금이 학교 경상수입의 전부다. 그 돈으로 전기세 등등을 내고, 그와 교사 세 사람의 급여를 나눈다. 여행 경비, 교재 및 영상 제작비용 등 일체는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건건이 사업계획서를 내서 타내는 돈으로 충당해오고 있다고 한다.

교수며 대기업 임원 등 출세한 친구들은 '상영이 같은 동창이 있는 게 우리의 자랑'이라며 '맘껏 마셔. 우리가 책임질게' 하다가도, 조용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면 어김없이 자기들끼리 이런 말들을 꺼낸다.

'그 때 그 주식은 어떻게 됐냐' '거기 집값은…' 그는 조용히 술만 마시는 도리밖에 없는데. "그 녀석들 만나면 예전엔 제 앞날이 조금 두렵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달라요. 나이 오십 다 돼서도 그런 얘기밖에 못 하나 싶거든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 행복감을 느꼈다'는 말 들어본 사람 몇이나 되겠어요?" 신혼 시절 아내에게서도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 학교가 고맙고, 선생님들이 고맙고, 무엇보다 애들이 고마워요. 탈북 청소년 교육? 통일? 그런 건 프로젝트 계획서용 멘트죠. 솔직히 전 통일에 별 관심 없어요. 그냥 좋아서, 저 좋자고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