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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기자의 바깥 [19] 가수 주정이

여객전무 2009. 11. 9. 18:44

 

 

 

문화
[최윤필 기자의 바깥] <19> 가수 주정이
"요즘 10代가 수들과 경쟁은 말도 안되죠, 욕심이라면 가수로 살다 가고 싶은 것 뿐…"
1970년대 중반 가수 故박경애와 듀엣 활동… '이사가던 날' '밤비야' 등 통기타곡으로 인기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어떤 노래의 한 대목, 혹은 전주의 한두 마디 선율이 기억의 단층 속에 이미지의 화석처럼 보존되는 예는 드물지 않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 가수 강산에의 아버지에게 그러했다는 것처럼, 어떤 노래가 세대적 감성 혹은 집단적인 심성에 스미는 경우도 있고, 개별적이고 내밀한 계기로 전혀 뜬금없는 이미지로 내면화하기도 한다.

그런 메커니즘을 역이용한 대표적인 예가 군가나 애국가, 노동가요일 것이고, 음악방송 선곡 담당자들이 달력과 날씨를 챙기는 것도 대체로는 그래서일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마들렌 향기를 통해 그 길고 쫀쫀한 삶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지만, 어떤 청각치료사들은 인간의 영혼이, 코도 뇌도 아닌, 귀와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대중 음악방송에 간여하는 이들은 그들이 의도했든 안했든 그들의 사소한 선곡 행위를 통해 청취자의 영혼의 한 지층을 흔들 수도 있다.

주정이(54)라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가 있다. 생애로나 가수로서나 가장 푸르렀던 1970년대 중반의 3년 남짓 동안 그는 '산이슬'이라는 여성 듀엣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들이 부른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이사 가던 날'과 '밤비야'라는 노래다. 그러다 이런저런 이유로 팀이 해체되고 두 가수는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산이슬' 멤버 중 다른 한 사람은 '곡예사의 첫사랑'이라는 노래로 당대의 10대 가수 반열에 들었고, 연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박경애씨다. 주정이씨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솔로 데뷔 직후인 1979년 겨울, 안소영ㆍ임동진이 주연한 공전의 히트 영화 '애마부인' 1편의 주제가 '서글픈 사랑'을 불러 노래는 제법 알려졌지만 그를 돋보이게 하지는 못했다.

통기타 포크가수들이 활약하던 음악살롱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춰가던 시절이었다. 불러주는 데가 없으니 노래 부를 기회도 차츰차츰 드물어졌다. 그의 노래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바람이 선득선득해지는 이맘때 아주 잊히지는 않을 정도로 들려왔지만 가수 주정이는 가뭇없이 잊혔다.
꼭 30년이 지난 올해, 그가 신곡까지 챙겨 넣은 새 앨범을 들고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사리 연락처를 수소문해 약속을 잡았다. 결혼하고 20년 넘게 전철이 닿는 서울 외곽의 한 도시에서 살았다는 그를 서울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렇게 많이 변했네요. 한동안 무교동, 명동의 음악살롱 누비면서 거의 매일 밤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기타 치고 놀면서 노래를 했거든요. 저쪽 블록에 '오비스캐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죠?!" 살짝 상기된 듯한 얼굴로 그는, 자신이 직접 썼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정리해 줬음직한 A4용지 한 장짜리의, '가수 주정이'를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새로 낸 음반과 함께 내밀었다. "제 기사를 처음 써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옛 이야기서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기로 했다.

"박경애씨와는 인천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어요. 실업학교였는데 합창단이 있었고, 우리는 장부정리 공부보다 노래를 훨씬 잘했고 좋아했어요. 졸업하면서 '전국노래자랑'에 나갔고…." 푸근한 동네잔치 같은 요즈음과 달리 그 시절 전국노래자랑은 실력파 가수지망생들의 진지한 등용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월 장원들끼리 겨루는 연말대회에서는 입상하지 못했지만 당시 가요계 한 실력자의 눈에 들어 음반을 낸다. "팀 이름 '산이슬'은 팝 칼럼니스트 이양일 선생이 지어줬어요. 음색이 맑고 곱다시며…." 번안가요들로 채워 낸 데뷔앨범에는 그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심지어 주소까지 인쇄돼 있었노라며 그는 순수했고 무모했던 그 때를 그리워했다.

데뷔하던 그 해(1974년) 말 '이사 가던 날'을 발표한다. 경쾌한 듯 느린 그들의 포크 가락과 노랫말에서 이농과 산업화의 폭력적인 물살에 저항하는 감성의 힘을 느꼈던 것일까. 미국와 유럽의 본토 포크를 그대로 소비할 만한 세대가 미성숙했던 탓도 있겠고, 젊은이들이 누릴 만한 버젓한 우리 가요가 드물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짧은 몇 년 동안 그들의 노래는 뜨겁게 소비된다. "대학은 못 갔지만, 전국 팔도 대학 축제는 거의 다 초청받아 다녔어요."

1977년 겨울 동양방송이 주는 그 해의 중창단상을 타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즈음에 팀이 해체된다. "이유요? 잘 모르겠어요. 우리 둘 사이에 라이벌 의식도 있었겠고, 늘 붙어 다니다 보니 감정이 상했을 수도 있죠." 각자 솔로로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뒤 그는 결혼했고, 가요계의 중심을 누비며 승승장구하는 친구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그러다 이렇게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경애가 가던 즈음에 다른 친구들도 여럿 갔어요. 아이들 키우느라 엄두를 못 내다가 '내 목소리 가기 전에 CD 한 장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데요. 준비를 시작하고 보니 새 곡도 넣고 싶고, 좋은 곡 얻고 보니 옛 생각도 나고, '나 지금도 이 정도 한다'고 자랑도 하고 싶고…."

그 결단과 결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LP가 CD로 바뀌더니 아예 음원이 유통되는 세상이 됐다. 비트와 리듬뿐 아니라 노래를 만들고 소비하는 시장 자체가 변했고, 가수가 활동하는 시스템과 메커니즘이 달라졌다. 어쩌면 가수라는 단어의 개념 자체가 변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몇몇 또래 가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도 음반 낼 채비를 하고 있다고, 몇 년째 준비는 하면서도 선뜻 못 내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도 개인적인 기념 이벤트쯤으로 음반을 준비할 때는 의기양양했는데, 조금씩 욕심이 생기니까 두렵고 외로워요."

모멸감은 없었을까. "음반 들고 방송국 찾아가면 쳐다도 안 보고 '거기 두고 가세요' 하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우두커니 서 있다가 눈치 보여서 돌아 나올 땐 '다 늦게 왜 내가 이런 짓을 벌이나' 싶기도 하죠. 안면 있는 친구들은 '매니저도 없이 그 수모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며 걱정해주기도 하고요."

돈 때문도, 이름을 알리고 싶다는 욕심 때문도 아니라고 했다. 남편과 함께 20년 넘게 운영해 온 자신의 카페에서 지금도 노래는 하고 있지만 그게 가수로서의 자의식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하더라고 말했다. "가요판은 온통 제 아들, 딸보다 어린 10대들이잖아요. 얼굴, 몸매는 얼마나 예쁘고 춤도 목소리도 얼마나 짱짱해요? 그들과 경쟁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다만 '저 가수 아직 노래하는구나' '괜찮네' 그런 소리 들으면서 가수로 살다 가수로 가고 싶은 거죠."

지방에 통기타 살롱이라도 개업하면 기념 공연하러 가수 여럿이 팀을 이뤄 대절 버스 타고 다니던 시절에 함께 활동했던 이들은 대부분 가요계를 떠났고, 몇몇은 세상을 떠났다. 누구는 성형수술이 잘못돼 담쌓고 지내고, 또 누구는 두툼해진 몸매 내보이기 싫어 사람을 피하고, 또 누구는 아파서 요양하고 있고…, 드물게 남아 음악방송을 하고 있는 이들이 그를 도와준다고 했다.

"그 시절에 우리 팀 막내로 이따금 공연에 합류하던 후배가 있어요. 지금은 아주 유명하고 영향력도 막강해져서 이름을 말하기도 부담스러운데…, 아무튼 조만간 그 후배에게 음반 들고 한번 찾아가보려고요. 모르겠어요. 예전처럼 살갑게 맞아줄지, 아예 몰라볼지, 알면서 누구시더라 하면서 데면데면해할지…." 서글퍼지려는 마음을 다잡듯 그는 "서운하게 대해도 할 수 없죠. 지난 세월 동안 어쨌든 전 바깥에서 지냈고,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요? 대접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고 도둑 심보죠."

쥐고 있던 뭔가를 놓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듯, 뭔가를 새로 움켜쥐려는 이에게도 세상은 낯선 모습으로 버텨 선다. 흔히들 삶을 여행에 비유하지만, 삶에서 맞닥뜨리는 세상은 새로운 여행지와 달리 대개는 외롭고 황량하다. 그것은 우리가 지나쳐 갈 나그네나 구경꾼이 아니라, 불편한 시선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비집고 껴 앉아야 하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세상은 그들이 마음 편히 앉을 수 있는 빈 자리가 남아 있는 세상, 지금보다는 훨씬 헐겁고 느슨한 세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어쩌면 우리가 잊어온 세상, 감성의 지층 속에 보존된 그 세상의 이미지를 간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