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테스트

선험과 후험의 경계

여객전무 2009. 5. 1. 10:00

 

 

1. 서론

 

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그 의미가 유사한 듯 하면서 다른 용법을 가지고 있는 용어들이 있다. 이런 용어들에는 실체와 실존, 사물과 대상, 속성과 요소, 참과 옳음 등이 있다. 이들 단어들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으면서도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 철학에서 이런 용어들은 보통 각기 다른 철학체계 내에서 문맥에 따라 정확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다. 이에 속하는 다른 예들로 우리는 선험적, 필연적, 그리고 분석적이라는 단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유사해보이고 같은 대상에 함께 적용되어 분리될 수 없는 개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이들이 사용되는 맥락은 다르다. 이들의 의미를 더 쉽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개념들에 반대편에 있는 용어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용어는 후험적, 우연적, 그리고 종합적이라는 것들이다. 선험적-후험적이라는 용어는 인식론적인 체계 내에서 주체가 어떤 대상을 경험을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가, 아니면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구분이다. 필연적-우연적이라는 용어는 존재론에서,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대상이 그것에 부여된 특정한 진리치 외에 다른 진리치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가, 가능한가에 따른 구분이다. 마지막으로 분석적-종합적이라는 용어는 명제에 적용되는 것으로, 명제의 결론의 진리치가 다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전제에서만 추론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구분이다. 문제는 이들이 대개 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처럼 함께 붙어있는 관계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a) 총각은 총각이다.

 

위 문장은 분석명제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분석명제인 이유는 다른 수단의 도움 없이 전제에서 결론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수단의 도움이 없다는 것은 경험적인 검증이 필요없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위 문장은 선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일률에 따라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도 참인 문장이므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세계는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세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b)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

 

명제 a에 비해 그것의 자명함이 조금 더 의심스러운 이 명제 역시 우리는 분석 명제라고 부른다. 또한 그만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선험성과 필연성도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단순 개념들이 의미하는 바를 의심하기 전에, 먼저 그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바를 조금 더 명확히 하는 것이 앞으로의 논의를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2. 개념 분석

 

‘철학은 개념 분석’이다(Putnam 2002: 189). 많은 경우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개념이 의미하는 것을 분석하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활동을 전적으로 “언어 비판 작업”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언어 비판 작업은 전적으로 분석 활동이었는데, 이 분석 활동은 우선 자연과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활동임과 동시에, 전통철학의 “사이비 문제”가 일상 담화의 형식에 대한 오해에 뿌리를 두고 생긴다는 것을 폭로하는 일과 과학 자체의 개념들을 “논리적으로 명료화시키는 일”을 통해서 전통철학의 사이비 문제를 제거해버리는 이중의 임무를 수행하는 활동이었다(Romanos 2002: 203). 이렇게 철학에서 언어의 명증성을 추구하는 일 중의 하나는 개념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개념은 단순개념복합 개념으로 나누어진다. 복합개념은 그 구성요소들을 드러냄으로써 분석할 수 있는 반면에, 단순개념에 대해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오히려 단순개념이 의미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저 그 개념과 똑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개념들과 관련시킴으로써 정의를 제시하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앞으로 다룰 선험성과 필연성과 같은 개념들은 단순개념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개념적 분석은 구성요소들을 확인한다는 의미로는 제시할 수 없다(Steup 2008: 68). 그렇다면 단순 개념을 정의하는 방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은 동의어를 진술함으로서 단순 개념을 재정의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을 사용해서 먼저 선험성을 정의해보고, 이를 통해 이들 개념들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 살펴보자.

 

 

1) 선험성

 

선천(a priori)후천(a posteriori)이란 말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로크가 이미 했었던 구별을 명시적으로 천거하면서 독일 철학자 칸트가 철학에 도입하였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선천적 지식을 경험과의 무관성에 의거해 정의했다. 칸트에 따르면, 선천적 지식은 경험에 선행하거나 경험과 무관하게 얻어지는 지식인 반면에 후천적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또다른 의문점을 야기시킨다. 첫째, 경험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가? 둘째, 경험과 무관함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경험에 대해 생각해보자. 경험은 감각 경험만이 아니라 기억과 내성까지 포함하는 경험이다(Steup 2008: 107-109). 다음의 문장을 보자.

 

c) 만일 준호가 서울에 살고,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면 준호는 대한민국의 수도에 산다.

 

이 명제의 요소인 주어와 술어들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 경험은 언어에 대한 지식과 문장에 대한 지식, 그리고 각 지시어가 지시하는 바를 판단하기 위해서 기억과 관련된 경험도 포함한다. 그러나 경험이 토대가 된다고 해서 이 명제가 후험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한 판단은 명제에 대한 관계만 알 경우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험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일반적으로 언급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겨지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앞의 ‘서울’과 뒤의 ‘서울’ 이 같은 것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인지적 가치’를 생각할 때, 이 전제를 너무 당연시 여겨서는 안된다. 서울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도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위의 문장은 경험을 통해 판별해야 하는 후험적인 문장이 되어 버린다. 이는 이름이 같을 경우 이름이 다른 경우 보다 같은 대상을 지칭한다는 언어 사용의 관행으로서 터득되는 것이다(김여수 1997: 623-624). 다음 명제는 어떨까?

d) 모든 백조는 희다.

 

위 명제 d의 정당성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경험적인 탐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역시 선험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 백조의 개념에 희다는 요소를 포함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선험적, 후험적을 판단 짓는 기준은 대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관련된다. 명제 d가 후험적이라는 것은, 그것의 진리치가 다른 대상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과 명제를 비교함을 통해 그 정당성을 판단한다. 그러나 c를 우리가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미리(즉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논리 체계’를 비교함을 통해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선험과 후험의 차이는 우리가 ‘어떤 명제를 정당화시킨다고 믿고 있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느냐 없느냐’로 귀결된다. 만약 우리가 백조가 희다라고 생각하는 정당하는 지식이 있다면 이것은 ‘논리 체계’를 통해 ‘선험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논리법칙을 후험적으로 획득하게 된다면, c를 판단하는 것은 그에게 선험적이지 않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백조가 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 관념이 논리법칙만큼이나 정당하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명제 c를 선험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좀 의심스럽다면, 좀 더 명확한 다음의 예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e) 정육면체는 12개의 모서리를 가지고 있다.

f) ([P→Q]→Q)→([Q→P])→P)

 

위의 두 명제는 선험적으로 참임을 알 수 있는가? e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정육면체임을 안다고 해서 12개의 모서리를 가짐을 안다고 반드시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이 참임을 판단하는 것은 실제로는 정육면체의 모서리를 세어본 이후에만 가능하다. 명제 e가 선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정육면체라는 개념에 12개의 모서리를 갖는다라는 개념을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항진 명제인 f가 참임을 선험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가 논리법칙을 알고 있고 그것에 따라 계산을 한 이후에만, 즉 논리법칙과의 비교라는 판단을 통해서만 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의심스러운 후험적 경험 명제를 살펴보자.

 

g) 지금 비가 온다.

 

비가 온다는 것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비가 와야한다. 그러나 g 역시 선험적으로참이거나 거짓임을 믿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비는 언제나 온다’라는 명제만 믿기만 하면 된다. 즉 e나 f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특정 믿음에서 선험적으로 끌어냈다면 g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선험적인 믿음에서 도출할 수 있다.

 

h) 빛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매질이 있어야 한다.

 

h라는 명제는 근대 과학에서 선험적으로 타당한 명제였다. 그러나 후에 실험을 통해서 그 매질인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되었고, 따라서 h는 이제 후험적으로 판단해야만 하는 문장이 되었다. 즉, 어떤 명제가 선험적이고 후험적인가는 그 당시의 지식 체계와 판단자의 지식 체계에 근거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선험성을 근거 짓는 또다른 특징인 필연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2) 필연성

 

이제 선험적인 지식의 정당화에 대한 두 번째 답, 즉 경험과의 무관성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차례이다. 하지만 이것은 선험적인 정당화를 발생하지 않는 것만을 알려줄 뿐 그것을 발생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떠한 경험에도 의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어떤 명제의 진리치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된다. 이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은 필연성 개념에 호소하는 것이다. 즉 명제를 선천적 명제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 명제의 필연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Steup 2008: 114-115).

우리가 다루려는 필연성은 강한 필연성인 논리적 필연성이다. 필연성과 가능성 문제에 관해 생각할 때는 논리적 필연성과 물리적 필연성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물리적 필연성은 자연 법칙을 따르는 명제들이며, 논리적 필연성은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명제들에 한한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10년을 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논리적 가능성은 형이상학적 가능성과 같은 의미로 쓰이며, 여기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는 다른 ‘가능 세계’란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즉 위의 예시에서 우리가 밥을 먹지 않고 10년을 살 수 있는 가능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 것을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솔 크립키는 「동일성과 필연성」이라는 논문에서 이와 관련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 및 비고정 지시어를 통해서 가능세계 내의 필연성을 정의하려고 했다. 고정지시어는 대상이 존재하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정대현 1987: 161). 만약 양자가 정확히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고정 지시어라면 모든 가능세계 내에서 필연성은 성립한다. 이와 같은 예로 다음을 들 수 있다.

 

i)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j) 햄릿의 저자는 셰익스피어이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금성의 각기 다른 이름이다. 이것은 후험적으로 검증되는 명제지만 두 대상은 같은 대상에 대한 고정지시어를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반면 후자의 명제는 비고정지시어인 ‘햄릿의 저자’를 포함하고 있다. 다른 가능세계 내에서는 햄릿의 저자는 셰익스피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에 j가 나타내는 명제는 필연적이지 않다. 이런 크립키의 견해를 확장하면 다음과 같은 선험적인 우연적 진리가 있을 수도 있다.

 

k) 파리에 미터의 표준이 되는 막대 S는 1미터이다

 

우리는 미터의 표준이 되는 막대가 1미터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안다. 그러나 S가 1미터의 길이를 가진다는 것은 필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연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표준 단위로 선택된 다른 S가 더 짧거나 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Grayling 2005: 136-137).

크립키의 고정 지시사와 관련하여 가능세계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다. 먼저 크립키의 지시체의 고정성 주장에서 본질주의가 도출될 수 있다. 본질이란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속성’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에 변하지 않는 어떠한 속성이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물론 가능세계의 문제는 본질주의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지만 비현실적인 대상에 관한 문제, 개별자들의 통세계적 동일성에 관한 문제들도 가능세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 모두를 다루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므로, 편의상 본문과 가장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주의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콰인은 <수학자 싸이클 선수> 역설을 통해 본질주의가 가지는 모순을 드러냈다. “수학자들은 필연적으로 이성적이지만 필연적으로 두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들 생각한다. 반면에 싸이클 선수는 필연적으로 두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이성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수학자이면서 싸이클 선수인 사람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이런 사람도 필연적으로 이성적이지만 우연적으로 두 다리를 가지고 있거나, 반대로 필연적으로 두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우연적으로 이성적이라고 해야 할까? 수학자 집단과 싸이클 선수 집단 그 어느 쪽에도 특별히 치우치지 않고 우리가 대상을 지시적으로 말하는 한, 그의 속성 중 일부는 필연적이고 일부는 우연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즉 콰인에 의하면 무엇이 x의 본질적 속성으로 생각되고 무엇이 우연적 속성으로 생각되는지와 관련해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우리의 결정은 항상 우리의 관심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Grayling 2005: 124-125).

본질주의는 ‘필연적’이란 양상개념은 사물에 관해 언급하는 것으로, 즉 ‘필연성’은 우리가 언급하는 바의 사물에 존재한다고 한다. 양화 양상 논리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비판자 콰인은 양화 양상 논리가 크립키와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콰인은 이상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주의를 한 마디로 형이상학적 밀림(metaphysical jungle)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그는 “필연성은 우리가 사물을 언급하는 방법에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언급하는 바의 사물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또한 “‘필연적으로...’라는 형식의 문제는 ‘필연적으로’가 지배하는 그 구성명제가, 분석적이며 그리고 그런 경우에만 참이다. 또한 ‘가능적으로...’라는 형식의 명제는 ‘가능적으로...’가 지배하는 그 구성명제의 부정이, 분석적이면 그리고 그런 경우에만 거짓이다”라고 지적한다(여훈근 2000: 135). 이 견해는 ‘규약주의’ 혹은 ‘약정주의’로 알려져 있다. 약정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어떤 대상을 특정한 이름으로 명명해놓고 그것의 본질을 묻기 때문에 마치 본질이 인간의 약정과는 무관하게 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약정주의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대상들을 분류하며, 이 분류에 따라 분류명이나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본질이 생긴다. 그 관심에 본질적으로 관련된 것이 그 분류된 것의 본질이다.” (박준호 1999: 160)

크립키 자신도 고정성은 규칙이나 약정이라고 인정한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고정성은 칸트식의 규제 개념 즉 세계에 관해 말하려는 언어 방식을 규정짓는 일종의 이상(an ideal)이다. 그가 고정성이 약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본질주의자의 필연성 또한 약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렇듯 고정성의 격위에 대한 검토 역시 본질주의를 성립시키게 하기 힘들다(박준호 1999: 169). 이렇게 본질주의 비판을 통해 우리는 가능세계가 그 근거를 찾기 힘든 주장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가능세계를 제외하고 선험성 및 필연성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 마지막 보루로서 분석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분석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3) 분석성

 

분석성이 무엇이냐를 살펴보는데 있어, 분석 명제와 종합 명제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을 줄 것이다. 분석적인 문장의 진리치는 말의 의미만으로 결정되며,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들은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앞선 예들 a와 f처럼 단지 그것들의 논리적 형식을 조사해서 논리적인 참임을 보일 수 있는 문장들과, 동의어들을 상호 교환한 다음 귀결되는 문장들의 논리적인 형식들을 조사함으로써 논리적 참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문장들이 바로 그것이다. 같은 종류의 구별을 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분석적으로 참인 문장의 부정이 자기 모순적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한편, 분석적이지 않은 모든 문장은 종합적이라고 불린다. 종합적인 문장들은 논리 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종합 문장의 진리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연루된 낱말들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 이상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Goroviz 1993: 169). 이렇게 본다면 분석성은 순전히 논리 구조에만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콰인은 분석적 진리와 종합적 진리 사이에 경계가 그어질 수 있다는 점에 반대했다. 그는 고전적인 논문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분석-종합 구분이 어떤 ‘독단’과 연결되어 있고 ‘환원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앞서 든 예 a와 b를 보면, 콰인은 a를 분석 명제로 인정하지만 b는 그것의 분석성이 동의어인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분석성’만큼이나 명료하지 않은 ‘동의어’ 개념에 호소한다고 생각해서 거부한다. 이 동의성은 ‘정의’에 기초한다. ‘총각’과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같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한 단어의 정의는 다시 무엇에 기초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분석성을 동의어와 정의로 파악할 수 없다면 무엇을 통해 그것을 정의할 수 있을까. 콰인은 여기에 ‘진리값의 변경 없는 상호 대치 가능성’을 동의어를 위한 기준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 역시 그 언어가 ‘필연적’이라는 용어를 포함하는 언어인 경우만 가능하며, 우리가 필연적이라는 양상 표현을 인정하는 것은 이미 ‘분석적’이라는 의미를 만족스럽게   이해했다고 상정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문제가 일상언어의 모호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콰인은 하나의 착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상화된 언어 L에 있어서도 그것의 분석성은 ‘의미론적 규칙’에 의해 정의되는데,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그 ‘의미론적 규칙’이 어떤 것이냐를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적 진술과 종합적 진술이 구분될 수 있다는 주장은 경험주의자의 비 경험적인 독단이며, 하나의 형이상학적 신념이라는 것이다(Quine 1993: 38-55).

콰인의 이러한 견해는 그라이스와 스트로슨의 「In Defense of a Dogma」에서 비판 받는다. 그 요지는, 첫째, 경계를 긋기 어렵다는 사실로부터 그 사이의 어떠한 구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드시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둘째, 콰인의 주장과는 달리 ‘분석적’이라는 표현에 소속된 개념군들 어느 것은 사실 ‘만족스러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분석성은 다음과 같은 여러 대안적 방식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넓은 의미에서 분석적 진술은 의미 덕분에 참이 되는 진술이다. 둘째, 분석적 진술은 그것의 술어가 주어나 주어 속에 포함된 것 일부를 되풀이 말하는 동어반복이다. 따라서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을 부정하면 모순에 빠진다. 셋째, 어떤 진술이 참이 된다는 것, 어떤 진술이 ‘분석적’이라고 규정되고 있다는 것은 순전히 언어적 규약의 문제이다. 넷째, 한 진술은 그것이 논리적 진리이거나 논리적 진리에로 환원될 수 있을 경우, 분석적이라고 생각된다. 콰인은 이 중 첫 번째 가능성을 의미에 의존한 정의라며 외면하지만, 그라이스와 스트로슨은, 확립된 용법이 있다면 의미란 것이 존재한다고 보며 받아들인다(Grayling 2005: 76-86). 첫째와 셋째는 화자들 간의 사용과 합의에 의해서 단어의 동의성이 결정된다는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규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관행적으로 분석적 진술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동의어를 통해서 논리적 진리로 변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이렇게 분석적 진리를 논리적 진리로 바꾼다면, 필연성을 통해서 분석적 진리를 옹호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연성에 대한 한 가지 해석에 따르면 어떤 진술의 부정이 모순이 될 경우에 그 진술은 필연적인 진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분석성을 논리적 진리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논리적 진리’라는 개념이 과연 잘 정의된 개념인지에 따라 달려있다. 그렇다면 이제 논리적 진리의 대표인 모순율을 살펴보자.

 

 

4) 모순율

 

앞서 한 진술의 필연적 참은 모순율의 필연적 참에 근거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모순율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모순율의 필연성 자체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모순’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누군가 어떤 것이 한 경우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그 경우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그는 모순을 저지른다. 즉 모순은 ‘P∨~P’ 이다 라고 형식화될 수 있다. 모순율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동일한 것(술어)이 하나의 동일한 것(주어)에 동일한 관점에 따라 동시에 주어지고 또한 주어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순율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법칙을 부정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그 부정의 반박을 통한 일반적이고 간접적인 증명마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러한 증명은 상대방의 가정에서 모순을 증명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방이 모순율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때 상대방이 인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그가 무엇을 말한다는 점이다. 그가 모순율을 부정할 때도 그는 그렇게 한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해할 무엇을 제공한다는 것의 가능조건은 어떤 특정한 것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트로슨은 술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대상을 분류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즉 술어의 사용은 경계를 짓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술어적 서술은 정보 제공적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술어적 서술의 정보치가 그 술어적 서술을 통해서 대상이 한 경계선의 어떤 측면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 자리잡게 되는 점이 본질이라면, 대상이 두 측면 모두에 자리잡을 경우 그 정보치가 바로 영(無)임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바로 이 점에서 엄밀히 말해 이해할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장기놀이에서 한 수를 두고 곧바로 그것을 되돌리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모순율은 언제나 어떤 일정한 것을 말할 수 있음에 대한 전제이며,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반박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조차 어떤 것도 말할 수 없게 된다.

모순율은 실재에 대한 법칙이 아니라, 모순율이 표현하는 필연성은 우리의 언어적 표현, 특히 “아니다”와 “그리고”라는 표현의 의미에 근거하고 서술 형식의 의미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순율은 바로 모든 분석적 문장과 같은 입장이다. 분석적 문장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함은 분석적 문장이 실재에 언제나 타당함을 말하지만, 분석적 문장이 실재에 타당한 이유는 바로, 분석적 문장이란 일정한 단어들이 하나의 일정한 의미 연관성 속에 위치한다는 것의 순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분석 문장이 타당하다는 것은, 단지 그렇지 않으면 모순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순율이 자체적으로 타당하다는 말은 단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우리의 말함 자체가 중지되어야 한다는 말이다(Tugenhat 1999: 52-65).

이런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모순율을 확보했고, 모순율을 통해 필연성을 구해냈다. 필연성을 구했다는 것은 분석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이제 이렇게 정의된 분석성을 가지고 선험적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분석과 선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분석성을 위한 기준은 논리적인 구조나 낱말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반면, 선험적이라는 기준은 증거나 경험에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험성은 필연성으로 완벽히 정의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둘 사이의 관계는 동치가 아니기 때문이며,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에 포함되는 요소라고 보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개념들의 관계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앞서 나는 선험성을 다룰 때 어떤 명제가 선험적인지 후험적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필연성을 구했음에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논리 세계와 현실 세계 간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3. 논리학과 수학

 

논리학은 여러모로 수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들이 기호만 다룬다는 것과, 각 기호들 간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에게 기호나 대상들 간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특정 상황에 형식화를 통해서 서로 관계가 있음이 드러날 뿐이다. 또한 논리학과 수학은 자신끼리의 관계에 의해서 닫힌 체계를 이루고 있다. 반면 수학과 논리학으로 분석되는 자연계는 이들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계의 대상들은 기호들처럼 분절되어 있지 않고 붙어있으며, 서로 간의 유의미한 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현실 세계는 닫혀 있는 체계가 아니라 열려 있는 체계다. 그것은 사물들이 다른 사물들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차적으로 체계가 열려있다는 의미는 한 대상이 그 체계 내에서는 완벽히 정의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면 닫힌 체계는 대상들이 체계 내에서 완벽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이들 간의 완벽한 무모순성을 얻기 위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괴델이 밝힌 불완전성의 정리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수학과 논리학이 자연계를 분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칸트는 우리의 직관이 오성의 형식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계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베르는 수학은 마음에서 생겨나고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시간으로 인해 이원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고, 이로 인해 수의 존재가 추론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기하학에 해당하는 것은 공간으로서 수학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Kline 2007: 408). 한편, 우리의 진화 방식을 생각할 때 우리의 지능이 자연계를 파악하는데 유리한 쪽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것도 타당하다. 왜냐하면 자연계를 올바로 파악하는데 실패했다면 그 종의 생존이 보장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오성이나 직관이 자연계와 완벽히 일치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다만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자연계를 근사하게 추론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발달했다고 본다면 자연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해 일어나는 수많은 착각과 인지부조화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과 오성에 바탕을 둔 수학 역시 자연계와 반드시 합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수학의 확실성에 대한 논의는 괴델의 증명 이후로 잠잠해졌다. 수학은 뉴턴 과학과 마찬가지로 경험 과학이다. 수학은 절대적 진리도, 불변의 법칙도 아니다(Kline 2007: 576). 이 말은 수학 역시 뉴턴 과학이 상대성 이론에 그 확실성을 내어 주듯, 더 발전된 이론에 자신의 입장을 변경시켜야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수학자 푸앙카레가 기호 논리학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과학자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수학 혹은 논리학과 자연계의 일치에 대해 의문시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에 ‘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자연에서 떼어놓고 자연적인 사물들과는 다른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고 보는 ‘초월주의’의 시각은 인간이 확실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자연주의란,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을 바라보려 하는 시각이다(한국분석철학회 1995: 12-13). 그렇다면 이제 자연주의를 살펴보자.

 

 

4. 자연주의

퍼트남은 1950년대에 있었던 <분석성>에 대한 위대한 논쟁들은 철학자들이 그들의 논의의 객관적이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기반을 찾으려 한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왜 철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언어 규칙>이나 언어 규칙의 결과라고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분석적 또는 <개념적으로 필연적>이라고 공언하게끔 되었는가? 일정한 언어 규칙이 확정되어 있으며 또 이 언어 규칙들에 의거하여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생각에는 몇 가지 이점이 있지만, 결론적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검증 기준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시인하였다(Putnam 2002: 186-190). 이러한 시인은 논리학이 궁극적으로는 세계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논리학의 원리와 현실세계의 원리는 다를 수 있다. 자연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인 어니스트 네이글은 「존재론 없는 논리학」에서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모순율은 발견의 원리이지 존재의 원리가 아니다. 따라서 모순율을 존재론적인 진리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모순율이 구별을 도입하는 일과 적절한 언어 사용법을 설정하는 일에서 규범이나 규칙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순율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사실”이나 “속성”의 구조를 기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모순율을 사용하여 얻은 결과를 모순율의 사용조건이라고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곽광제 1993: 133). 논리의 원리들을 계속 사용하는 일은 이치에 닿는 탐구를 지속시키는 일일 뿐이지, 사물의 불변적 구조에 의존하는 우연적인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공리를 지닌 논리학을 선택한다는 것은, 특정한 공리를 지닌 수학 체계(유클리드 기하학, 리만 기하학등)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지닌 고유의 필연성이 더 크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중의 한 체계가 어떤 지식 체계를 만드는 도구로서 다른 체계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절하다는 사실에 기초를 둘 것이다. 모리스코헨은 이런 의미에서 논리는 진리를 획득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한다(곽광제 1993: 310). 콰인도 이러한 견해에 동참한다. 그는 수정불가능한 진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논리적 법칙인 배중률의 수정 조차도 양자 역학을 단순화하는 수단으로 제안되었다고 말한다(Quine 1993: 62-65). 이런 입장들은 실용주의적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5. 실용주의

 

실용주의는 논리학의 도구적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논리학이 그 자체로 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실용주의에 있어서 참은 유용성이다. 이제 우리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선험성에서 마무리 못한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명제의 선험적(혹은 분석적) 속성은, 특정한 시대의 지식의 정도와 어떠한 분류방식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칸트는 ‘모든 물체는 연장을 갖는다’는 명제를 분석적인 것으로, ‘모든 물체는 중량을 갖는다’는 명제를 종합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즉, 그는 ‘공간을 차지함’은 물체의 의미 속에 포함되어 있지만, ‘중량을 가짐’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물체 혹은 물질에 대한 현대적 분석은 칸트의 이러한 구별을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만약 분석적 명제가 지식의 축적에 따라 결정된다면 어떻게 그것이 확실히 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고래는 포유 동물이다’라는 명제는 분석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1세기 전에만 해도 고래는 어류로 분류되었다. 현재 생물학자들은 고래를 서식지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보다 그것이 온혈이고, 숨을 쉬고, 태생을 한다는 사실에 따라서 분류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은 고래가 아니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분류 방식의 적합성이다. 1932년 해롤드 유리가 중수소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것이 비록 화학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수소의 새로운 동위원소로 명명했다. 그러나 동위원소는 언제나 화학적으로 분리불가능하다고 정의되어왔었다. 이러한 사례들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은 개념의 사용 혹은 그 적용은 항상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명제를 선험적(분석적)인 것으로 판단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무시간적으로 참인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이 그렇다고 해서 영구히 유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명제가 선험적(분석적)이냐, 후험적(종합적)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것에 실용성을 둘 것인가에 따라 달린 문제다. 그것은 의미에 관한 어떤 초인간적인 구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려는 우리의 필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선험성과 후험성의 경계를 짓는 문제는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에 대한 구분은 우리의 탐구를 규제하고 우리의 지식을 조직하는데 공헌한다는 점에서 구분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Abel 1995: 79-83).

6. 결론

 

지금까지 개념 분석에 의해 선험성, 필연성, 그리고 분석성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처음에 쉽게 정의될 줄 알았던 선험성은 필연성에 의거해서 설명되어지며, 이 필연성은 분석성에, 그리고 분석성은 논리학의 원리인 모순율의 해명을 통해 비로소 그 개념이 성립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명제를 선험적이냐 후험적이냐라고 판단할 때 그것은 필연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필연성은 자연과는 무관한 논리의 법칙을 따르는 반면에 선험성은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구조를 따르기 때문이다. 자연계에서 인간의 독립적인 위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자연주의라 한다. 자연주의는 논리학을 발견의 도구로 파악하지 존재의 진리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곧 실용주의 진리관과 일치한다. 실용주의 진리관에 의거해 우리는 선험적과 후험적이라는 판단 기준을 새롭게 규정함을 통해 그것이 가지는 모호성을 극복할 수 있다. 그 기준은 유용성이며 그 척도는 바로 인간이다.

 

 

 

참고도서

 

곽광제 편. 1993. 『논리와 철학』 (서울:서광사)

김여수 외. 1997. 『언어, 진리, 문화 (1)』 (서울:철학과 현실사)

박준호. 1999. 『현대 본질주의』 (서울:서광사)

여훈근. 2000. 『논리 철학』 (서울:고려대학교 출판부)

정대현 편. 1987. 『指稱』 (서울:文學과知性社)

한국분석철학회. 1995. 『철학적 자연주의』 (서울:철학과 현실사)

홍병선. 2006. 『현대 인식론 논쟁』 (서울:한국학술정보)

Abel, Reuben. 1995. 박정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인가』 (서울:고려원)

Goroviz, Samuel, et al. 1993. 안건훈. 『철학적 분석』 (서울:고려원)

Grayling, A.C. 2005(1997). 이윤일. 『철학적 논리학』 (서울:선학사)

Kline, Morris. 2007(1980). 심재관. 『수학의 확실성』 (서울:사이언스 북스)

Putnam, Hilary. 2002[1981]. 김효명. 『이성·진리·역사』 (서울:문지사)

Quine, W.V.O. 1993(1980). 허라금. 『논리적 관점에서』 (서울:서광사)

Romanos. G.D. 2002[1983]. 곽강제. 『콰인과 분석철학』 (서울:한국문화사)

Steup, Matthias. 2008[1996]. 한상기. 『현대 인식론 입문』 (서울:서광사).

Tugenhat, E. and Wolf, U. 1999[1982]. 하병학. 『논리-의미론적 예비학』 (서울:철학과 현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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