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조선왕릉탐방 -소경원, 의령원, 회묘

여객전무 2009. 12. 16. 11:17

문화재 향기
[조선왕릉의 비밀 25 - 소경원, 의령원, 효창원, 회묘]
2009-12-11 오후 07:25



           
     소경원 (비공개)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길(원당동) 산 37-1 (서삼릉내 위치)


서삼릉 가는길 |
서울시내 → 구파발 → 삼송리 검문소에서 좌회전(삼송역) → 농협대학 지나서 이정표




                                       < 소경원 | 昭慶園 >



조선 16대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의 원이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큰아들이자 효종의 형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9년간 심양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명의 멸망을 직접 목도한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다. 이는 인조의 의심을 샀다.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하였으나 급사하였다. 부인 강빈 역시 죽음을 당하고,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어 두 아들이 사망했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하였으나 고종 때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 의령원 | 懿寧園 >



조선 21대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큰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52)의 원이다. 의소세손은 태어난 다음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 추계예술대학, 중앙여고 자리)에 묻혔다가 1949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효창원 | 孝昌園 >



조선 22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86)의 원이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에 장사지내 효창묘라 했다가 효창원으로 바꾸었다. 효창원이 있어 그 일대가 효창공원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회묘 | 懷墓 >



조선 10대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1445~82)의 묘이다. 한미한 양반집안의 딸인 윤씨는 집안이 궁핍해지자 궁에 들어왔다. 성종보다 열두 살 연상이지만 빼어난 미모로 1473년(성종 4) 숙의에 봉해졌고, 원비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해 연산군을 낳았으나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의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1489년 묘비조차 없던 윤씨의 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했다.성종이 1494년 승하하고 그 국장기간에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1504년 연산군은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호를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다. 능의 석물 또한 왕릉의 형식을 따라 조성하게 하고, 제향 절차를 종묘에 위패를 모신 역대 왕의 제사 절차에 맞추도록 했다. 1506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지만 겉모습은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다. 조선 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는 회묘의 석물은 웅장한 무석인과 문석인, 호석과 양석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회묘는 원래 서울 동대문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 경희대학교 공사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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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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