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조선왕릉탐방 - 영휘원, 숭인원

여객전무 2009. 12. 1. 09:30

문화재 향기
[조선왕릉의 비밀 23 - 영휘원, 숭인원]
2009-11-30 오후 04:16




           
                       사적 제 361 호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 영휘원 | 永徽園 >


<원은 왕릉과 달라 대체로 석물이 작고 무인석이 생략되며, 무덤 규모도 작다. 그래서 영휘원은 봉분 주변에 부채형 모양의 곡장이 둘러쳐져 있고, 석양과 석호도 양쪽에 1쌍씩 4기가 배치되었다>

 조선 26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純獻貴妃, 1854~ 1911) 엄씨의 묘이다. 귀비 엄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5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궁 밖으로 내쫓겼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환궁하였다.

 

궁에 다시 들어온 귀비 엄씨는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과 왕세자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으로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된다. 귀비 엄씨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친왕(1897~1970)을 낳았다. 1907년 영친왕은 11세에 일본 유학이라는 형식 하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고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경술국치의 변을 당했다.



귀비 엄씨는 나라를 잃은 슬픔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다 1911년 58세로 눈을 감아 청량리 영휘원에 안장되었고, 신위는 덕안궁에 모셨다가 1929년 육상궁(칠궁)에 모셔져 있다.


 

                                          < 숭인원 | 崇仁園 > 


<돌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원자의 무덤이지만 원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다만 사초지가 낮고 봉분이나 석물들이 작게 만들어져 있다>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22)의 묘이다.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본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1921년 아들 진을 얻었으나 9개월의 짧은 생을 살고 눈을 감았다.




순종은 너무도 큰 슬픔에 왕자의 묘에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었고, 묘호를 숭인원(崇仁園)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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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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