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영월 장릉

여객전무 2010. 11. 8. 10:29

 

이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비공개인 경우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멀다는 이유로 그동안  답사하지 못했던 영월 장릉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그 사연의 길이만큼이나 도성으로부터 먼 곳에 위치하게 된 단종의 장릉을 방문한다는 설레임이 시작부터 여느 왕릉답사와는 달랐다.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릉에 관해 글을 쓰면서 장릉을 사릉으로 모셔와 합장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었다. 왕릉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위치해야 한다는 조선왕실의 장례 예법에 따르자면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월 장릉을 방문하고 난 지금은 장릉천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단종이 유배되어 살았고 또 승하하여 묻힌 영월을 주민들은 ‘충절의 고장’이라 일컬으며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어떤 조선왕릉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애착도 그와 같지는 못했다.


수도권에 조선왕릉이 밀집되어 있어 그 희소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렇다는 것이 이유라면, 수도권에 위치해 있되 도성 밖 100리가 넘어 다른 왕릉에 비해 희소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여주 영릉이나 화성 융건릉도 해당지역에서 이정도로 지역에 밀착해 있지는 못했다.

 

 

 

이 먼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소년왕의 무덤이 적적하리란 예측은 빗나갔다. 목 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는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의 명당 가운데 용의 머리에 자리 잡은 소년왕의 무덤 앞은 왕릉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호장 엄홍도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메고 눈 덮힌 산을 올라와 사슴이 앉아있던 눈 녹은 자리에 암장을 했다. 중종 때 단종의 묘를 갖추는 것이 허락되기까지는 평장된 상태였던 장릉이 지금과 같이 정자각을 갖춘 왕릉으로 복위된 것은 한참 후인 숙종 때의 일이다. 그것이 서러웠던지 장릉의 문인석은 찡그린 채 울고 있다.


가파른 능침 아래 자리 잡은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ㄷ'자 모양으로 꺾여있다. 정자각 앞 우물 ‘영천(靈泉)’은 생각보다 깊고 물이 맑고 풍부했다. 영험한 샘이라는 영천에 소원을 빌면서 던져 넣어 수북이 쌓인 동전이 맑고 투명한 물밑에 쌓여있다. 단종의 충신들을 모신 장판옥 위패 가운데 안평대군의 이름 옆으로 사육신의 이름이 보인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도 보이고 단종의 뒤를 따랐던 무당이며 노비들의 이름도 적혀있다.


우리 코레일에서 왜 영월의 하행열차 시격을 다섯 시간 가까이 벌려놨는지 모를 일이다. 강릉발 열차의 수가 적어 그렇다면 해당지역에서 증차요구 내지는 영월 단종 테마역임을 내세워 영월시발열차라도 만들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열차운행시각이 이와 같다면 서울방면에서 열차를 이용해 영월에서 단종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강릉발 상행열차가 오후 1시 20분경에 있고 다음열차는 오후 5시 50분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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